배움에게 배웅 따윈 없어

공존의 가치를 위해 '말이 칼이 될 때'

새 날 2018. 11. 10.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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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은 매우 상징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우선 그동안 여성을 향한 노골적인 편견을 혐오표현으로 드러내던 방식에서 벗어나 직접적인 증오범죄로까지 이어졌다는 점에서다. 물론 이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여혐이냐 아니냐의 논쟁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해당 사건에 대해 당시 강은희 여성가족부 장관은 여성혐오로 단정지어선 안 된다는 입장을 피력하였으며, 검찰 역시 여성혐오가 아닌 정신질환에 의한 범죄라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그렇다면 남성들은 해당 사건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여혐이 아니라는 데도 자꾸만 여혐으로 낙인을 찍는 여성들의 행태가 못마땅하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남성들에게 있어 이번 사건은 공포나 위협과 같은 특별한 감흥으로 다가올 리 만무하다. 약자가 아닌 탓이다. 그러나 여성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일상적 공간이 지뢰밭처럼 온통 위협적인 요소로 받아들여진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많은 여성들이 일상 생활조차 안전하게 누리는 일이 어려워지고 두렵다며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편견에서 시작되어 혐오적 표현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차별과 폭력을 야기, 급기야 증오범죄로까지 연결되는 이 전형적인 루틴을 두려워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건이 불거진 뒤 여성들이 실제로 체감하며 호소하는 불안감의 종류는 아마도 여성가족부나 수사를 담당하던 검찰의 발표와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었을 테다. 그렇기에 전적으로 여성의 시각으로 이번 사건을 바라보자면, 맥락상 여혐에 가깝다. 여성들은 추모 쪽지 붙이기와 여혐 비판 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향후 비슷한 사건이 불거질 때마다 조직적으로 이에 대응하는 모습도 읽힌다. 결과적으로 볼 때 패미니즘적 담론이 그 어느 때보다 횡행하는 등 여성운동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다. 



한편 온라인 구석진 곳에서 감정의 찌꺼기를 배설하듯이 혐오표현을 일삼아오던 일베가 지난 2014년 신은미 황선 통일콘서트 현장에 폭탄을 투척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아울러 같은 해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이어가던 현장에서 폭식 투쟁을 벌인 것도 다름 아닌 일베라 불리는 커뮤니티다. 두 사건 모두 증오범죄의 일종이다. 온라인 공간에서 혐오표현에 심취해 있던 집단이 급기야 오프라인을 통해 그 실체를 드러내면서 자신들의 사상과 신념을 단순히 표현만으로 그치는 게 아닌 직접적인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민족과 인종, 종교, 그리고 성 정체성 등과 관련한 증오범죄의 개연성이 사회문화적 여건상 유럽이나 미국 등의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는 무심코 행해지거나 혹은 습관적으로 다뤄지는 등의 혐오표현이 결국 폭력과 호모포비아 등의 증오범죄로까지 언제든 이어질 수 있음을 여실히 입증하는 사례다. 


혐오표현은 이렇듯 증오범죄로 연결될 개연성이 농후하기에 적절한 규제가 필요하지만, 표현의 자유라는 보편적인 권리 측면에서 바라볼 때 이에 대한 접근은 늘 신중해야 한다. 때문에 사실 혐오표현과 표현의 자유, 이 둘 사이는 딜레마에 가깝다. 혐오표현에 대한 규제를 강화할 경우, 일상적으로 누려야 할 표현의 자유가 침해될 개연성이 높고 그럴수록 이득을 보는 쪽은 언제나 약자가 아닌 강자가 되기 십상이다. 때문에 각 국가마다 혐오표현을 다루는 방법이나 이의 해법 역시 해당 국가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정치사회적 배경에 따라 각기 달라진다. 



홍성수 교수가 쓴 책 '말이 칼이 될 때'에는 전 세계에서 그동안 고안되고 실천되어온 거의 모든 반 혐오표현 대책이 망라돼 있다. 이들 가운데 우리에게 적합한 것도 있겠으나 그와 반대로 그렇지 않은 것들도 제법 존재한다. 아울러 우리 사회에서 불거졌던 각종 혐오표현과 증오범죄, 이를테면 강남살인사건, 메갈리아, 맘충과 노키즈존 등의 논란에 대한 명쾌한 해설도 곁들이고 있어 이들 사건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2017년 8월 미국 버지니아주, 백인우월주의 세력의 집회에서 3명이 숨지고 30여 명이 부상을 입는 참사가 발생하였으나 트럼프 대통령은 되레 테러 세력을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내뱉는다. 이후 많은 여야의 유력 정치인과 사회 인사들이 일제히 사퇴하거나 비난 성명을 발표하는 등 집단 반발에 나섰다. 미국의 숨은 저력이 가감없이 발휘되던 순간이다. 혐오표현에 대한 규제는 극소화하면서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용인하는 넉넉함은 바로 이렇듯 자율적으로 혐오표현을 고립시킬 줄 아는 성숙한 시민의식과 무르익은 사회적 여건 덕분일 테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은 어떨까? 위정자라는 사람들이 종교 세력 등의 압박에 못이겨 오히려 '동성애에 반대한다' 따위의 혐오적 발언을 대중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표현하는 게 바로 우리의 실태다. 예컨대 해외에서는 기업이나 정치인 할 것 없이 소수자에 대한 혐오표현을 반대하며 그들의 활동에 연대와 지지 의사를 명확히 표현하는 데 반해, 우리나라에서는 선거 때마다 특정 세력이 혐오표현을 강요하고, 이들의 한 표를 무시할 수 없었던 후보자들은 결국 해당 세력이 원하는 답을 내놓기 일쑤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진보 진영에 가까운 정치인들조차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특정 종교 세력의 집요한 휘둘림에 어쩔 수 없이 소수자 혐오에 굴복하는 모양새를 취하곤 한다. 



이 책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하며 강조하고 있지만, 혐오표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무얼까? 모든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는 공존의 사회를 만들어 가기 위함이 아닐까? 약자들이 불안감을 느끼고 공포에 휩싸인 채 살아가는 공간이라면 이러한 공공선의 가치는 결국 요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유럽이나 미국 등 여타의 국가에 비해 별다른 대책 없이 팔짱만 끼고 있는 게 바로 우리의 현실 아닌가. 이 책은 여전히 척박한 이 땅에 혐오표현의 범위는 어디까지이며, 혐오표현이 어떤 해악을 끼치는지, 아울러 혐오표현를 향한 엄중한 사회적 메시지와 이를 고립시키는 방안을 모색하고 주의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는 데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다소 난해하고 복잡한 데다가 이해관계마저 상충하는, 그래서 때로는 결코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가치들이 함께해야 하는 까닭에 좀처럼 이해하기 쉽지 않은 내용을 다루고 있으나 저자의 뚜렷한 진보적 가치관과 명료한 필치의 글로 인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여 있다. 


이 책을 통해 모두가 혐오표현의 심각성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우리 사회에 절실한, 공존이라는 심오한 가치를 위해.



저자  홍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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