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저냥

배우는 왜 극한 직업인인가 '내 뒤에 테리우스'

새 날 2018. 10. 10.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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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공주'에서 친구들 모두가 외면할 때 공주(천우희)에게 먼저 다가가 살갑게 손을 내밀던 마음씨 착한 친구가 있었다. 다름 아닌 은희였다. 지금도 어슴푸레 기억이 나지만, 그렇다면 나는 왜 은희를 기억하는 걸까? 당시 그녀가 맡았던 배역만큼이나 따뜻한 이미지로 다가왔던 까닭에 특별히 눈여겨 보았던 것 같다. 그리고는 곧 잊혀졌다. 어느덧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녀, 정인선이 MBC 드라마로 안방 극장에 대뜸 얼굴을 내밀었다. 그것도 주연으로 말이다.


매주 수요일과 목요일마다 소간지라는 별칭을 얻고 있는 소지섭과 환상의 케미를 선보이고 있는 그녀, 알고 보니 내가 기억하던 바로 그 정인선이었다. 아이 둘을 키우며 한 가정을 알뜰살뜰 꾸려나가는 억척스러운 전업주부이자 옆집에 사는 전설의 전직 NIS 블랙 요원 김본과 이리저리 얽히면서 첩보전에 뛰어들게 된다는 고애린 배역을 맡은 것이다.



이 드라마를 통해 정인선은 그녀만이 지닐 법한 연기인으로서의 매력을 한껏 뽐낸다. 보호 본능을 일으킬 만큼 여리디여린 면모를 드러내다가도 아이들 앞에서 만큼은 모성 본능이 제대로 발동, 씩씩한 엄마로 돌변하며, 심각한 분위기를 자아내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코믹한 상황으로 급반전하는 등 말 그대로 팔색조의 연기력을 펼친다. 특수 요원으로서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 데다 늘 인상을 쓰고 있는 소지섭 앞에서 천진난만하게 장난을 치는 그녀는 어쩔 수 없는 애교덩어리다. 그런 그녀 앞에서 허당 소지섭이 억지로 무게를 잡아가며 점잖을 떠는 모습은 그래서 왠지 더욱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보잘 것 없는 육체의 기능을 한껏 확장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군사적 용도로 개발된 드론의 경우 요즘 쓰이지 않는 영역이 드물 만큼 다양한 곳에서 활용되고 있지만, 드라마 등 방송계에서의 쓰임새는 특히 두드러진다. 시야의 한계로 우리가 볼 수 없는 뷰를 드론 하나만으로 무한 확장시켜주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내 뒤에 테리우스' 이 드라마에서도 드론의 쓰임새는 단연 돋보인다. 첩보물인 까닭이다.



주인공의 얼굴을 비추는가 싶더니 카메라가 갑자기 공중부양하면서 우리의 시야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보다 넓은 영역을 커버할 때면 x좌표와 y좌표만으로 이뤄진 평면 위주의 화면이 좌표 하나를 추가함과 동시에 탁 트인 입체적인 장면으로 태세가 급작스레 전환되곤 한다. 우리의 안구가 시원해지고 가슴이 뻥 뚫리는 순간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속 일부 남성 캐릭터들은 왠지 뻔한 틀 속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느낌을 받게 한다. 물론 다분히 의도적인 연출로 짐작되지만 말이다. J인터내셔널의 진용태(손호준) 대표나 고애린의 남편 차정일(양동근)이 무심코 내뱉은 말들은 요즘 같아서는 하나 같이 소박 맞기에 딱 좋은 발언들이다. "주부가 집에서 밥이나 하고 빨래나 하지 일은 무슨 일이냐" "돈도 못볼면서 집에서 하루종일 뭐하고 있었느냐"



전형적인 가부장적 시각이다.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특정 짓는, 성역할을 고착화시키는 발언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류의 사고가 남성들을 지배해온 경향이 크다. 고애린은 드라마 속에서 여전히 그와 비슷한 유형의 남성들로부터 고초를 당한다. 그러면서도 늘 씩씩하게 버텨온 그녀다. 아무래도 작가가 여성이다 보니 우리 편이 아닌, 즉 마음에 들지 않는 캐릭터에 일부러 이런 성향을 불어넣은 뒤 가까운 훗날 아주 가루가 되도록 짓뭉개버리려는 의도 아닐까 싶다.



이 드라마의 미공개 영상 1회분이 최근 공개됐다. 이에 따르면 유난히 무더웠던 올 여름에 촬영이 이뤄졌다. 본방 1,2회차에서 소지섭은 후드티를 자주 입고 등장한다. 어느덧 10월 하고도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기온이 더욱 떨어졌기에 후드티가 지금으로써는 제격이지만, 40도에 육박하는 기온 속에서 후드티를 입고 촬영하다 보니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저절로 흘러내리기 일쑤였을 테다.



일종의 메이킹 필름인 미공개 영상에는 바로 이러한 장면이 여과 없이 포착돼 있다. 소지섭의 얼굴 위로 땀이 주르륵 흐르는 장면 말이다. 그리고 촬영 현장에는 늘 휴대용 선풍기를 들고다니는 모습도 카메라에 담겼다. 아울러 촬영을 위해 애쓴 스텝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인사를 건네는 정인선의 따듯한 마음 씀씀이도 살포시 흔적으로 남겨졌다.


드라마의 제작과 방영 사이에는 통상 일정한 시간적 간극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 드라마의 경우에는 여름에 제작되었고, 현재 방영 중이다. 촬영 당시의 계절과는 관계 없이 드라마가 방영되는 시점의 계절에 맞도록 의상을 갖춰 입은 채 이에 임하는 배우들, 아울러 보이지 않는 곳에서 늘 열정을 쏟아붓고 있는 스텝들, 오로지 시청자들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선사해주기 위함일 테니 이쯤 되면 전형적인 극한 직업인이 아닐 수 없다.



* 이미지 출처 : POOQ(푹) 영상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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