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직장인의 '갭이어'요? 사실 별것 아닙니다

새 날 2018. 9. 30. 20:05
반응형

근래 '갭이어(Gap year)'라는 용어가 이곳 저곳에서 심심찮게 들려온다. 심지어 관련 문화가 확산 중이라는 기사들도 쏟아지는 추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어떤 일이 있었길래 이러한 개념들이 회자되고 있는 걸까? 아니 그보다는 '갭이어'라는 단어가 당췌 무슨 의미인지가 더 궁금해진다. 신조어가 등장한 게 아닌가도 싶었다. 하지만 살펴보니 새로운 용어는 아니었다. 그냥 학업 도중 잠시 휴식기를 갖는다는 의미로써의 쓰임새였다. 그렇다면 역시나 '워라밸'이나 '소확행'의 연장선인 걸까?

 

보다 정확히는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대학 진학을 하지 않고 여행이나 인턴십, 봉사활동, 진로탐색 등을 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쌓는 시기를 일컫는다. 영국에서 등장한 개념이다. 그래서 그런 걸까? 이는 사실 우리의 현실과는 많이 동떨어져 있다. 우리의 경우 외국과는 달리 자녀들이 보통 경제적인 자립이 이뤄진 뒤에야 독립하는 경향이 크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부모와 함께 지내는 사례가 많다. 덕분에 한국형 갭이어는 영국이나 미국 등 외국과는 달리 대학생이나 직장인들 사이에서 주로 언급되곤 한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갭이어가 뭐 별거인가 싶다. 우리말로 그냥 휴식 내지 쉼, 그도 아니면 재충전이라고 하면 그만인 용어를, 우리의 현실과는 잘 맞아떨어지도 않으면서 굳이 이를 가져다 억지로 활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 이유를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내가 관심을 두게 된 건 고등학생도 아닌, 대학생도 아닌, 바로 직장인의 갭이어다. 비록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여건 탓에 그리 녹록지는 않더라도 어쨌거나 대학생들에게는 휴학이라는 훌륭한 제도가 있지 않은가.

 

 

반면 보편적인 직장인들의 경우 갭이어가 될 만한 시간을 갖기란 현실적으로 녹록지 않다. 아니 매우 어렵다. 자신이 원한다고 하여 대학생의 휴학처럼 휴직을 낼 수 있는 처지가 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결국 휴식기를 갖기 위해서는 직장을 그만둬야 한다는 의미인데, 금수저가 아닌 이상 당장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판국에 이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때문에 아주 가끔 각종 매체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곤 하는 소위 딴짓러들의 이야기나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오곤 하는 '나는 행복한 불량품입니다' 류의 도서속 무용담(?)은 그저 딴나라 이야기로 들려올 뿐이다.

 

물론 그들의 매우 우아한(?) 결단과 행동에 대해서는 나 역시 박수를 보내는 입장이다. 나로서는 절대로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일을 꾸미거나 마구 벌여놓는 그들의 딴짓 덕분에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처럼 이른바 딴짓을 행동으로 옮길 여력이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의 용기가 부러운 건 분명 맞지만 그런 결정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들이 직장을 그만두더라도 당장의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는 나름의 기반을 갖춰놓았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아시아경제

 

어디 내놓아도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의 뛰어난 스펙을 갖춰놓았든, 그도 아니면 어떠한 환경과 조건에서도 생계가 가능하도록 탁월한 능력을 보유해놓았든, 일반적으로 둘 다 아니면 둘 중 하나 아닐까? 이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뒤따르고 눈물을 훔쳤을지는 그 전 과정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다. 알고 보면 이들이 벌이던 딴짓에는 이렇듯 지난했던 과정이나 말못할 어려움 따위가 끈끈하게 배어 있다. 결국 직장 생활보다 더욱 힘들면서도 혹독한 사전 준비 과정이 전제되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대한민국 노동시장의 현 주소는 또 어떤가. 유연성이라곤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다. 여전히 취약하기 이를 데 없는 시장은 자꾸만 계약직 등 비정규직만 양산하고 있는 형국이다. 쉽게 퇴직하고 쉽게 재취업이 가능하다면야 얼마든 갭이어니 재충전이니 하는 따위의 개인 시간을 가질 수 있을 법한데, 현실에서는 퇴직은 사직서 한 장 내면 그만일 만큼 쉬우나, 이직 내지 재취업은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 없다. 더구나 휴식기는 경력을 쌓는 데도 오점으로 남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직장인들에게 있어 가장 현실적인 휴식이나 쉼으로서의 대안은 무얼까? 과연 있기나 한 걸까? 물론 있기는 하다. 오늘자 기사로 올라온 을지로 주변을 찍은 한 매체의 화보인데, 아마도 아래의 사진 한 장으로 대변할 수 있지 않을까?

 

ⓒ더팩트

 

마치 대한민국의 직장인 모두가 일시에 모이자고 약속이라도 한듯 엄청난 인파가 동시에 시름을 달래고 있는 놀라운 광경이다. 어떤가? 왠지 이 사진 한 장을 보는 것만으로도 오늘의 피로가 싹 풀리는 느낌 아닌가? 그렇다면 퇴근 후 호프집에 오손도손 둘러앉아 노가리에 맥주 한 잔 걸치면서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추가 안주 삼아 이야기하고 하루의 고단함을 씻어내는 행위가 평범한 직장인들에게 있어 가장 현실적인 쉼 아닐까? 야외에 앉아 술 한 잔 걸치면서도 질서정연하게 줄을 맞춘 모습은 너무나도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직장인의 갭이어? 알고 보면 참 별것 아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류의 담론은 누가 됐든 계속 이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쉬운 소리들이 자꾸만 쏟아지다 보면 언젠가 우리의 노동시장도 조금은 유연해질 테고, 개인들이 재충전할 수 있는 문호 또한 약간이라도 넓혀지게 될 듯싶어서다. '워라밸'이라는 신조어가 한동안 유행하고 있을 때 모두가 이를 노래 불렀더니 OECD 회원 국가 가운데 두 번째에 해당할 정도로 장시간의 노동에 허덕이던 우리들을 결국 그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단초를 마련하지 않았던가. 물론 아직은 많이 미흡하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당장은 현실성이 없어 보이는 어설픈 담론이라 해도 계속되어야 할 당위성은 충분하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