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에서의 날선 설렘

산 정상까지 데크가 깔린 매력적인 등산로

새 날 2018. 9. 27.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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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에 데크가 쭉 놓여 있다. 물론 이는 그다지 새삼스럽지 않은 풍경이다. 요즘 데크는 어디에서건 흔한디흔한 시설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곳의 데크는 우리가 자주 봐왔던 방식과는 그 결이 사뭇 다르다. 청태산 자락에 위치한 '국립 횡성 숲체원'에 설치된 데크는 단순히 어려운 코스를 잇거나 길을 건너게끔 하는 일반적인 용도의 것과는 달랐다.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등산로로써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곳의 탐방객들은 지그재그 형태로 걸음을 옮겨야 하는 수고로움이 뒤따른다. 물론 결과적으로 볼 때 이는 산행을 훨씬 수월하게 하는 기능을 해주고 있지만 말이다. 목재로 짜여진 데크는 1/21의 완만한 기울기로 탐방객들을 산 정상까지 안내한다.

 

일반적으로 경험했던 산행처럼 시간에 쫓기듯, 혹은 숨을 헐떡거리면서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는 건 굉장히 매력적인 요소다. 그러면서도 발걸음을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옮기다 보면 정상에 조금씩 다가서게 된다. 자신의 몸이 정상에 닿아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 힐링은 절로 이뤄진다. 등산 덕후들의 입장에서는 그게 무슨 산행이냐며 코웃음을 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런 형태의 산행은 단언컨대 단점보다 장점이 월등히 많다.

 

 

지나친 경쟁 구도 속에서 살아가다보니 우리의 일상은 매사가 경쟁이다. 오직 앞만 바라보며 걷다보면 주변을 돌아볼 겨를이나 여유가 사실상 거의 없다. 그나마 짬짬이 활용할 수 있는 시간마저도 스마트폰에 고스란히 양보하는 현대인들 아닌가. 하긴 걸을 때조차 손과 눈에서 이를 떼지 못하는 판국이니 오죽할까 싶다. 나는 등산을 좋아하지도, 그렇다고 하여 딱히 싫어하지도 않는 타입이다. 누군가 함께하자고 하면 아주 가끔씩 이를 즐길 뿐이다..

 

 

그런데 근래에는 이 산행이라는 레포츠조차 경쟁 일변도로 흐르는 듯싶어 조금은 안타까운 심경이다. 그러다 보니 등산복도 기능보다는 옷에 붙어 있는 브랜드의 종류가 무엇인지 따위가 더 중요해지는 등 과시용으로 둔갑하곤 한다. 비싼 아웃도어 의상으로 온몸을 치장한 채 동료들에게 뒤처질새라 그저 앞만 바라보며 정상을 향해 숨을 헐떡이면서 걷는 모습은 어찌 보면 안쓰럽다. 어렵사리 정상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한숨을 돌리기 바쁘다. 결국 여타의 일들처럼 등산도 과정보다는 정상을 밟았는지 혹은 밟지 않았는지 따위의 결과에 더 큰 비중을 두게 된다. 이렇듯 우린 경쟁에 치여 매사에 지쳐 있기 일쑤다.

 

 

그러다 보니 뚜렷한 목적 의식 없는 삶은 흔히 지탄의 대상이 되곤 한다. 물론 산행에도 목표는 흔히 정해지기 마련이다. 보통 일정한 시각까지, 특정 지역, 이를테면 정상을 밟고 내려오는 등의 목표를 정해놓곤 한다. 이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기꺼이 있는 체력 없는 체력 모두 끌어모아 한꺼번에 쏟아낸다. 물론 목적이 있는 산행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이를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아주 가끔은 아무런 목적의식 없이 진정으로 나 자신과 마주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일탈도 방황도 아닌, 목적 없는 산행을 하다 보면 왠지 우리의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진짜의 나와 마주하게 될 것 같기 때문이다.

 

침엽수로 빽빽히 들어찬 청태산 중턱에 마련된 숲체원 탐방객 자율체험 코스 'H+로드', 그 가운데서도 '건강한 미래로드'는 일반 등산처럼 목표 따위를 사전에 정해놓고 이를 향해 바쁘게 오르는 류의 코스가 아니다. 햇빛 한 점 찾기 힘들 정도로 울창한 숲속을 천천히 걷다보면 숲이 제공해주는 온통 푸른색의 건강한 색감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다가와 얼굴 위를 슬쩍 스치는 게 느껴지고, 향긋한 풀내음 등이 코끝의 후각세포를 자극해오며, 각종 벌레소리며 새소리, 그리고 바람소리까지 다가와 나의 고막을 진동시키는 등 오감을 부드럽게 자극해오는 까닭에 자연스레 긴장을 늦추게 되고 굳어 있던 마음도 무장해제시키게 된다.

 

 

그동안 무작정 혹은 지나치게 앞만 바라보며 달려오지는 않았는지, 아울러 무한경쟁 속에서 나 자신을 잃고 그저 관성에 몸과 마음을 맡긴 채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찬찬히 돌아보게 된다. 이곳 숲길은 기대 이상으로 편하고 부드러운 곳이었다. 덕분에 등산복이며 등산화 따위를 굳이 갖추지 않아도 된다. 마음을 내려놓고 육체의 긴장을 최대한 이완시킨 채 걷다 보면 여유와 쉼이 한층 가까워진다. 바쁘게 사느라 혹시 놓치고 온 건 없는지, 그리고 소중한 것들을 잊은 채 지나친 건 아닌지,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지나온 길을 차근차근 되돌아보게 한다. 

 

 

목적 없이 뚜벅뚜벅 걷다 보니 나의 몸은 어느새 '건강한 미래로드'의 끝길에 닿아 있었다. 제아무리 느린 걸음이라 해도 왕복 한 시간 반가량이면 이 코스를 완주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무들이 뿜어내는 피톤치드와 건강한 공기가 나의 몸속을 깨끗하게 세척해낸 느낌이다. 무엇보다 이곳은 걷는 일에 불편을 느낄 수 있는 환자나 장애인 등도 손수 등산을 체험케 해준다는 사실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실제로 휠체어를 이용해 오르는 장애인과 지팡이 없이는 걷기 어려워 보이는 어르신들도 수월하게 산에 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마침내 전망대에 올랐다. 주변 산봉우리들이 죄다 발 아래 놓인 걸 보니 높은 지형임은 분명하다. 다만, 말이 전망대일 뿐 나무들 때문에 시야가 가려 아래를 온전히 바라볼 수는 없었다. 치유의 종을 울린다. 정확히 세 번.. 이를 통해 나의 내면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본다.

 

 

그동안 이토록 쉽게 올라온 산이 있었던가? 산행이라고 하면 늘 거창하게 아웃도어 의상을 쫙 빼입고 갖은 힘 다 써가면서 반드시 정상을 밟아야 할 것처럼 여겨졌는데, 숲체원에서의 산행은 기존의 것들을 죄다 뒤짚고 있는 게 아닌가. 이런 게 바로 전복이 선사해주는 쾌감이라고 하는 걸까? 보다 많은 사람들이 숲과 친해질 수 있도록, 아울러 조금 더 수월한 산행이 가능해지도록 비슷한 체험장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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