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다"

새 날 2018. 9. 16.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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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한두 명이었다. 앳되어 보이는, 그러니까 갓 고등학생이 되었을까 말까 싶은 아이들이 집앞 골목길 주차장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나는 보았다. 우리 아이들도 아닌데 나는 굳이 이 아이들을 제지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 모른 체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이들은 자신들이 무언가 몹쓸 짓을 벌인다는 사실을 아는 듯 꽤나 조심스러워 보였다. 다음 날에는 서너 명으로 불어났다. 아이들의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으나 그래도 아직은 견딜 만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는지 아이들 손엔 여지 없이 담배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나는 또 모른 체했다. 남의 일에 끼어들어 봤자 내게 이득이 되는 일이 드물다는 사실을 숱한 경험을 통해 익히 잘 알던 터다. 되레 아이들과 말을 섞었다가 괜시리 망신을 당하거나 곤혹스러운 일을 치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다.


아이들은 점점 대담해졌다. 서너 명에 불과하던 아이들은 어느덧 십여 명까지 불어났다. 주차장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골목길은 어느새 아이들로 꽉 들어찼다. 한두 명이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땐 그래도 일부 어른들이 지나가면서 한 마디씩 타이르곤 했는데, 아이들이 불어나자 더 이상 이들에게 참견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무섭다며 피해다니는 형국이었다. 이제 골목길은 완전히 아이들이 독차지, 이들의 아지트가 되고 만다. 담배를 피우고 연신 가래침을 길바닥 위에 뱉어댔다. 가래침 올리는 소리만 들어도 역겹기 짝이 없는데, 이들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담배꽁초며 가래침이며 온갖 쓰레기들로 쑥대밭이 되곤 했다. 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는데, 그러기로 했는데, 왠지 그와는 자꾸만 거리가 멀어지는 느낌이다.



아이들의 연령대는 다양했다. 아직 초등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어린 녀석부터 언뜻 봐서는 성인처럼 보이는 아이들까지 골고루 섞여 있었다. 어른들은 하나 같이 이들의 행위를 외면하기 바빴다. 둔감하게 살기로 한 나 역시 앞서 언급한 이유 때문에 이들의 행동에 관여하지 않았다. 덕분에 아이들이 이제는 낮이건 밤이건 개의치 않고 이곳에 드나들었다. 새벽에 출몰하는 아이들로 인해 잠에 깊이 빠져들었다가도 깨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몰래 숨어 담배를 피우던 아이들이 주변에서 이를 말리는 어른이 없자 점점 대담해져 갔다. 아주 어려보이는 녀석들일수록 되레 보란 듯이 입에 담배를 문 채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다.


ⓒ국민일보


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는데, 그래서 둔감하게 행동했는데, 도리어 이들 때문에 둔감해질 수가 없는 형국 아닌가. 아이들을 말릴 수 있는 어른은 나뿐 아니라 이제 아무 데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공권력의 힘을 빌리게 된다. 하지만 알다시피 우리나라의 공권력은 무척 바쁘다. 신고하면 아이들이 한바탕 난리를 치고 모두 떠난 뒤에야 슬그머니 나타나 무슨 일이 있었느냐며 되묻곤 한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면 절대로 아이들과 말을 섞지 말라며 마치 대단한 조언이라도 되는 양 이를 길게 늘어놓는 게 전부다. 그러면서도 정작 그들에게 연락을 취하면 매번 이런 패턴의 반복이다. 그래서 도대체 어쩌라고..


내가, 아울러 가정에서, 학교에서, 지역사회에서, 그리고 모두가 둔감하게 살기로 작정하니 어느덧 이런 결과가 빚어졌다.


ⓒ연합뉴스


집앞에는 오래된 빵가게가 있었다. 주인 내외를 잘 알기도 하거니와 빵 맛이 좋아 주로 이 집에서 빵을 구입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점포를 정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이유가 무척 궁금했으나 깊은 속내까지야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자리에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법한 번듯한 프랜차이즈 빵가게가 들어섰다. 물론 주인은 다른 사람이었다. 나는 어느덧 이 프랜차이즈 빵 맛에 길들여졌으며, 통신사가 제공해주는 포인트 사용 재미에 푹 빠져 예전의 그 단골 빵가게는 완전히 잊어버렸다. 빵가게 주인이 누가 됐든 나와는 이제 관계 없는 일이 돼버렸다. 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다.


집에서 걸어가면 대략 10분 정도 소요되는 위치에 얼마 전 대형마트가 들어섰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블랙홀이 따로 없었다. 우리 동네 마트가 전국에서 가장 장사 잘되는 곳으로 등극한 것이다. 잘사는 동네도 아닌 허름한 변두리이건만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무척 의아했다. 그런데 이 즈음 사회 일각에서는 프랜차이즈 업체나 대형마트가 동네상권을 초토화시킨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와는 크게 상관 없는 일이었다. 나는 이 사회의 충실한 소비자 신분이기에 그저 깨끗한 환경에서 값싸게 소비하기만 하면 그 뿐이었다. 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형마트의 영업 제한 소식이 들려왔다. 매월 둘째 넷째 일요일이면 강제로 문을 닫아야 한단다.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소식인가. 이런다고 지저분한 재래시장이 살아날 것이며, 시스템이 취약한 동네 가게가 살아난다더냐. 나는 한 사람의 소비자로서 만족스럽기만 하면 그만이기에 동네에 프랜차이즈가 들어오든 대형마트가 들어오든 이들의 입성을 언제든 환영하는 입장이다. 무슨 자본의 논리니 상생 따위는 개나 주라 하고 싶다. 나만 편하고 꿀이득이면 그만이지 그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그래서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영업 제한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커뮤니티와 SNS 등에 마트 영업 제한에 대한 불만을 마구 쏟아냈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나와 같았기에 나는 더욱 힘을 발휘했다. 여론이 한 곳으로 수렴되는 느낌이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다. 그러나 나의 사적인 이익을 침해하는 행위만큼은 도저히 묵과할 수도, 둔감할 수도 없었다. 급기야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청와대에 관련 청원을 올렸고, 결국 나를 불편하게 만들던 마트 영업 제한 정책에 철퇴가 가해졌다. 대단히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언제가 됐든 이제 나는 마음껏 소비할 수 있는 진정한 소비자로서 거듭난 느낌이다. 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다.


이후 대형마트가 독이 올랐는가 보다. 영업 제한 조치가 풀리자마자 연중 내내 세일 등 파상공세에 나서면서 나를 비롯한 주변 소비자들을 한꺼번에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블랙홀이 되어가는 대형마트 주변으로는 온갖 종류의 점포들이 파죽지세로 들어섰다. 반면 우리집 주변의 상권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기울어가는 형국이었다. 급기야 하나둘 문을 닫더니 새로 들어서는 건 죄다 프랜차이즈 형태의 점포 일색 아닌가. 기존의 독자 점포를 운영하던 이웃 가운데 일부는 프랜차이즈 시스템 속으로 어쩔 수 없이 편입되었고, 또 나머지 이웃들은 할 일이 마땅치 않고 갈 곳도 딱히 없다 보니 대형마트의 계약직원이 되곤 했다. 동네에서 조그만 슈퍼마켓을 운영하던 아저씨는 느닷없이 모 편의점 점주로 돌변하였으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집앞에서 족발집을 운영하던 아주머니는 대형마트의 캐셔가 되어 정신 없이 일하고 있었다.


내가, 아울러 가정에서, 학교에서, 지역사회에서, 그리고 모두가 둔감하게 살기로 작정하니 어느덧 이런 결과가 빚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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