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특성화고 3년생 '너'의 취업 도전기

새 날 2018. 9. 7.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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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서울에 소재한 한 상업계 특성화고등학교에 다닌다. 녹록지 않은 가정 형편으로 일찌감치 대학 진학을 포기, 취업을 하기로 작정하고 선택한 학교다. 너는 선취업 후진학이라는 제도가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또래보다 속 깊었던 너는 그래서 일단 취업을 한 뒤 가까운 훗날 대학 진학을 도모하면 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더구나. 너는 어느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던 것으로 안다. 훌륭한 성적을 보면 금세 알 수 있단다.


취업과 연계된 관련 자격증도 여러 개 취득했더구나. 정말 기특하다. 컴활, 워드, ITQ, 전산회계, 은행텔러, SMAT 등 가능한 건 모두 땄으니 말이다. 뿐만 아니다. 학교에서 실시하는 취업 특강에도 열심히 참여, 자소서 작성이나 면접 기술 등도 충분히 익혔더구나. 주변에서는 자소서 한 줄 더 메우고 면접에서 좋은 점수를 얻으려면 무엇보다 스토리가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것으로 안다. 착실한 너는 입학하자마자 동아리에 가입하고 봉사활동에도 참여하는 등 부지런히 생활했더구나. 너의 행실만으로도 이러한 성향이 고스란히 읽힌단다.


너는 드디어 3학년이 됐다. 이제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에 한껏 고무된 표정이 역력하더구나. 하지만 복병이 생겼다. 지난 해 제주에서 발생한 현장실습 사망 사건 때문에 현장실습제도가 크게 바뀌면서 3학년 초부터 가능했던 취업의 문이 막히고 만 것이다. 일선 학교에서는 공기업과 금융기업, 대기업 이외에는 내보낼 수 없다며 아예 문을 걸어 잠궜다. 현장실습제도가 변화하면서 기업들 역시 채용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분위기다.



너는 크게 낙담한 것 같더구나. 가뭄에 콩나듯 올라오는 채용공고는 직업계고 전반을 둘러싼 이러한 분위기 탓에 비슷한 처지에 놓인 전국의 수많은 특성화고 등 직업계고 졸업예정자들의 각축장으로 변모한 지 오래다. 그만큼 바늘구멍이 된 것이다. 그나마 고졸자 전형이라도 별도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감사하게 받아들여야 할 일이었다. 1학기는 이렇게 후딱 지나갔다. 너가 조바심을 느꼈을 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름방학 때 마냥 놀지 않고 학교에서 마련한 특강에 참여하는 등 칼날을 더욱 예리하게 다듬었던 너다. 기특하더구나.


어느덧 2학기가 됐다. 학교가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취업을 내보내겠노라며 일제히 팔을 걷어붙인 것이다. 채용공고도 1학기 때보다는 다양해졌으며 확실히 숫자도 증가했다. 하지만 너는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더구나. 오로지 남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군 미필자에게는 채용의 문을 아예 굳게 걸어 잠그고 있었다. 고졸자, 그것도 상업계 남학생에게는 취업의 문호가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우리 사회가 진정 학벌사회로부터 벗어나길 바란다면 운동선수들에 대한 특혜처럼 이들에게도 모종의 정책적 배려가 절실해보이는 대목이다.


ⓒ뉴스1


스펙이 아닌 능력 위주의 사회로 만들겠노라며 정부 차원에서 NCS를 도입한 지 벌써 여러 해가 지났다. 채용 전형 역시 블라인드 방식으로 점차 바뀌고 있는 추세다. 실제로 블라인드 채용에 나선 기업들은 한결 같이 학력과 나이, 성별 등의 제한 없이 모든 이들에게 취업의 문이 활짝 열려 있노라며 떠들어대기 바쁘다. 그러나 너는 무척 현명하더구나. 이러한 표현에 결코 속아 넘어가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블라인드 채용이라 해놓고선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필기시험 과목에는 대학 전공과목을 버젓이 적어놓거나 외국어 인증 점수를 요구하기 일쑤 아닌가. 더불어 필기 시험은 대학 졸업 수준이라는 언급까지 덧붙이면서 확인사살까지 하곤 한다.


때문에 고졸자를 위한 전형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 이상 이들에게 있어 각 기업의 블라인드 채용은 단지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예전처럼 대졸자를 뽑겠다며 공공연하게 밝히는 게 도리어 속이 덜 쓰릴 것 같다. 그런데 이뿐만이 아니다. 너는 최근 한 공기업의 채용공고를 보고선 쓰디쓴 웃음을 지어보이더구나. 뽑고 싶지 않았으나 정부의 시책으로 어쩔 수 없이 고졸자를 채용하고 있노라는 티가 팍팍 났기 때문일까?


일반 전형, 즉 대졸자 전형은 수십 명을 채용하면서도 고졸자 전형은 고작 1명만 채용하는 공기업이 비일비재했다. 이래놓고 우리 회사는 고졸자를 채용한다며 동네방네 크게 떠벌릴 게 틀림없었다. 그나마 군필 여부를 따지지 않아 남학생인 너에게 유리한 공기업 채용은 이렇듯 생색내기로 일관하는 경우가 허다하고, 스펙 및 학벌을 타파하고 역량과 능력 위주의 사회로 가는 데 일조하겠다면서 블라인드 채용 방식을 도입한 기업들은 필기시험을 통해 고졸자들의 진입을 원천적으로 막거나 일반 사기업들은 군필이나 면제만을 원하는 까닭에 너가 진출할 수 있는 회사는 그야말로 눈을 씻고 찾으려야 찾아볼 수도 없는 실정이다. 내가 괜시리 미안해지는구나.



스펙과 학벌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해놓고서 이렇듯 정작 직업계고 졸업자들을 찬밥 대우하고 있으니 앞서의 선언들은 모두 공염불에 불과한 게 아닐까? 너가 너무도 속상해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 마음도 편치 못하단다. 어른들처럼 술이라도 마음대로 마실 수만 있다면 솔직히 들이붓고 싶은 심정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다면 선취업 후진학 등 직업계고만 졸업하면 누구나 쉽게 취업 가능하며 대학 진학 또한 수월해진다는 달콤한 말만 선뜻 믿고 특성화고등학교로 진학한 너는 바보가 된 걸까?


사회에서 너희를 바라보는 냉대 어린 시선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병폐 가운데 하나인 학벌사회를 타파해야 할 정부 그리고 기업마저도 한결 같이 손을 놓고 있는 무책임한 분위기인 까닭에 너는 어른들을 더욱 더 믿을 수 없게 된 것 같구나. 안타깝다. 너는 유난히 무더웠던 지난 여름이 지나고 찬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면서부터 유독 불안감을 크게 느끼는 것 같더구나. 취업을 못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우려 때문일 것이라 짐작된다. 지금 같은 추세라면 솔직히 너가 졸업하기 전까지 과연 온전한 취업이 가능할는지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구나.


오늘도 학교에서 새로운 채용공고는 없는지 유심히 살피면서 하릴없이 자소서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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