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어쭙잖은 위로는 상처만 될 뿐이다

새 날 2018. 9. 3.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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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서들이 하나 같이 경쟁력을 키워 타인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노하우만을 전수하던 시절은 한물 간 지 오래다. 작금의 시류는 그와 방향성이 전혀 다르다. 취업절벽 시대를 관통하고 있는 요즘이다. 좌절감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청년들더러 오히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라거나 심지어 백수를 즐기라는 기성세대의 조언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근래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과 생활의 균형 잡힌 삶을 추구하는, 이른바 '워라벨'의 경향성이 출판계라고 하여 예외일 리 없다. 아니 도리어 이러한 분위기를 주도하는 쪽은 바로 출판계가 아닐까 싶을 만큼 그럴 듯한 제목의 콘텐츠들을 시장에 마구 쏟아내고 있는 실정이다. 근래 자기계발서와 인문서적 류는 일상에 지친 현대인들, 특히 청년들을 향한 다독임과 위로 일색이다. 일견 바람직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프니까 청춘'이라며 청년들의 아픈 속을 되레 후벼 파놓더니 최근에는 바늘구멍보다 좁다는 채용시장에서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해보려다 쓰디쓴 좌절감만을 안은 채 제풀에 지치고 꺾인 청년들에게 저자 자신의 사례를 들어가며 '딴짓'을 해보라고 권하거나 '소확행'이 최고이니 작은 일상에 만족하라며 자꾸만 등을 떠밀고 있는 형국이다.



물론 우리 사회의 경우 특정 경로를 밟는 삶만이 성공한 것이라는 획일화된 인식이 팽배한 실정에서 이렇듯 '딴짓'에 기웃거리는 등 보다 다양한 양태의 삶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으며, 우리에게 무한 행복감을 선사해줄 수 있노라는 인식의 확산 혹은 전환은 대단히 바람직스러운 움직임이 아닐 수 없다. 나 역시 이러한 삶의 방식을 어느 누구보다 환영하고 응원하는 입장이기에 더더욱 그러하다.


최근 서울의 집값이 폭등하면서 그에 비례해 2030세대의 좌절감 역시 더욱 증폭되고 있는 양상이다. 비혼족이 늘고 있고 출산율은 세계 최처치를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다. 무엇 하나 녹록지 않은 청년들의 삶이자 미래가 아닐 수 없다. 이에 호응이라도 하듯 사회 각계에서는 단순한 위로 차원을 넘어 "정규직이 아니어도 좋다" 거나 "나는 행복한 불량품이다" 혹은 "신의 직장 관두고 글로 먹고 살기" 따위의 콘텐츠를 선보이면서 청년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고 있는 눈치이다.



최근 백수 이야기로 핫한 인기를 모으고 있는 모 작가가 출간 기념 강연회를 개최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제 백수냐 정규직이냐의 구분은 점점 무의미해지고 있다. 노동과 휴식, 정규직과 백수, 좋은 직업과 돈 버는 것에 대한 굴레를 벗어버리고 여행도 가고 책도 보고 연애도 해야 한다. 우리는 대학을 졸업하고 인턴이라도 들어가기 위해 기를 쓰고 다음 목표는 안정적인 정규직이 되기 위해 또 다시 죽도록 노동만 해야 한다."


취업난에 내몰린 청년들로 하여금 백수로 살 것을 권장하고 나선 것이다. 물론 여기서의 백수란 잉여나 쓸모없음이라는 보편적인 의미로써의 쓰임새가 아닌 스스로의 삶을 능동적으로 관리하는 일종의 프리랜서 개념에 가깝다. 아울러 작가가 언급한 굴레로부터 벗어나는 삶이란 현대인들이라면 누구나가 꿈꾸고 머릿속에서 그려왔음직한 그러한 종류의 것이다. 하지만 말이 좋아 백수고 정규직이 아니어도 괜찮지, 종국엔 청년들에게 닥친 작금의 어려움이 구조적인 모순인 까닭에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현재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방도가 없으니 차라리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고 이를 받아들이라는 꼰대적 가르침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씁쓸하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심지어 재능이나 스펙조차 없는 청년들에게 구조적 변화나 환경의 개선 없이 이러한 주장을 내세우는 건 공허하기 짝이 없다. 아직은 회사사회라 불릴 정도로 모든 사회적 혜택이 기업에 집중되고 있는 상황이기에 비정규직이어도 괜찮다거나 백수가 되라는 주장은 물론 제 아무리 비유적인 표현일지라 해도 위험천만하며 무책임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아울러 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운 뒤 '나는 행복한 불량품이다' '신의 직장 관두고 글로 먹고 살기' 등을 주장하며 무언가 다른 삶을 사는 것처럼 이쁘게 꾸미고 포장한 이들의 사례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다가온다. 규격을 벗어난 불량품이라거나 프로딴짓러라는 둥 자신들의 지극히 개인적인 도전과 변화를 세간에 일고 있는 최신 트렌드에 끼워 맞춘 채 시류에 편승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지는 탓이다. 


나는 이들의 사례를 보고 섣불리 비슷한 행동을 취하는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란다. 처음에 언급된 작가가 백수를 몸소 겪은 시기는 이미 박사 과정을 밟는 신분이었으며, 불량품이나 딴짓러가 됐다며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는 이들의 사례 역시 요즘 청년들이 자의반 타의반 겪게 되는 고역과는 거리가 멀다.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생존 욕구조차 충족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이를 채우려는 몸부림과 기본적인 욕구는 모두 해소하고 최종단계인 자아실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딴짓에 관심을 쏟는 건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비정규직이라는 워딩에는 급여 등의 단순한 처우 문제만 함의돼 있는 게 아니다. 빈부격차 등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다양한 문제점들을 응축시켜놓은 일종의 모순덩어리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규직이 아니어도 좋다, 백수가 되라는 주장은 소확행과 워라밸처럼 최근 어려움에 처한 청년들로 하여금 현실에 안주하라는 메시지 그 이상도 아닌 것으로 다가오기 십상이다. 어쭙잖은 위로는 상처만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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