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누가 더 진짜 같은 가짜인가 '게임의 이름은 유괴'

새 날 2018. 8. 16.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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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기획사 직원 사쿠마가 기획한 회심의 프로젝트가 광고주인 자동차회사 가쓰라기 부사장에 의해 전격 중단되는 사태가 빚어진다. 덕분에 사쿠마를 중심으로 한 해당 프로젝트 팀은 해체의 비운을 겪게 되고, 승승장구하던 사쿠마 역시 입사 이래 최대의 위기와 맞닥뜨리게 된다. 그동안 피말리는 경쟁 속에서도 결코 패배를 몰랐던 그였기에 가쓰라기가 안긴 억울함과 모멸감은 그의 감정을 극단의 처지로 몰아가고도 남을 정도다. 일이 좀처럼 손에 잡힐 리가 만무했다.


고조되어가던 사쿠마의 감정은 점차 가쓰라기 부사장 개인을 향하게 되고, 결국 그의 집으로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따져 묻기로 마음을 굳히며 이를 실행에 옮기게 된다. 이처럼 그의 분노 게이지는 점차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하지만 감정에 이끌린 신체의 움직임은 늘 후회를 낳곤 한다. 분노로 일그러진 그의 몸뚱아리가 막상 가쓰라기의 집 앞까지 맹렬한 기세로 따라붙긴 했으나 가쓰라기를 과연 어떤 식으로 만나 요리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바로 그 때다.



가쓰라기 부사장 집에서 한 젊은 처자가 몰래 담을 넘어 빠져나가는 모습이 그의 시선에 포착된다. 막막하던 차에 혹시 돌파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차오르던 순간이다. 일단 그녀의 뒤를 쫓기 시작하는 사쿠마다. 그녀는 가쓰라기의 과거 애인이 낳은 딸 주리였다.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가출을 감행하던 순간 이를 우연히 사쿠마가 목격하게 된 상황이다. 사쿠마는 아직 앳된 그녀가 묵을 수 있도록 숙소를 제공해주고, 두 사람 각자가 바라는 바의 달성을 위해 가짜 유괴 사건을 벌이기로 작당 모의한다.


즉, 사쿠마가 가쓰라기의 딸 주리를 납치, 유괴한 것처럼 설정하고 가쓰라기를 협박하여 돈을 뜯어내기로 계획한 것이다.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대충 지껄인 계획이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들 각자가 생각하고 목표로 향하던 것에 적당히 부합하면서 실행으로 옮길 수 있게 된 셈이다. 사쿠마는 유괴 게임을 통해 직무에서 가쓰라기로부터 당했던 모멸감을 일정 부분 씻어낼 계획이었고, 주리에게는 당장 목돈이 필요하던 순간이었다. 이러한 각자의 절실함이 이들을 의기투합에 이르게 하는데...



일본의 인기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 소설인 '게임의 이름은 유괴'는 애써 기획한 프로젝트를 하루아침에 중단시키며 사쿠마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뭉개버린 자동차회사 부사장 가쓰라기, 그리고 가출한 부사장의 딸을 이용하여 마치 유괴한 것처럼 꾸며 사적인 보복을 노린 광고 기획사 직원 사쿠마가 벌이는 고도의 심리전을 그리고 있다. 주도면밀한 계획 및 실행은 감탄을 자아내게 할 정도로 그 밀도가 촘촘하며 치밀하기까지 한데, 여기에 반전의 묘미마저 더해지면서 읽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사쿠마, 그가 지닌 삶의 가치관은 업무의 일환으로 만든 '청춘의 가면'이라는 이름의 게임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기보다 철저하게 상황에 어울리는 가면을 쓰고 살아온 인물이 바로 그였다. 스스로의 삶을 살기보다 상대가 좋아할 만한, 그리고 기뻐할 만한 가면을 쓰고 완벽하게 그에 맞춘 가짜 삶을 살아온 셈이 된다. 매 순간에 걸맞는 적절한 가면을 뒤집어 쓰고 인간관계 역시 적당히 비위를 맞추며 유지해온 덕분에 결코 실패를 모르고 살아온 그의 삶에 균열을 일으킨 건 다름 아닌 가쓰라기 부사장이다.



가면으로 철저하게 자신을 감추고 주도면밀하게 계획한 것들을 과감히 실행에 옮긴 사쿠마의 유괴 전략은 언뜻 그의 짜릿한 승리로 끝나는 듯싶다. 하지만 종류 불문하고 모든 게임의 승패 여부는 단 한 판만으로 가려지지 않는다. 사쿠마보다 더욱 철저하고 교묘하게 스스로의 정체성을 감춘 가면을 뒤집어 쓴 채 가쓰라기와 그의 가족이 펼치는 반전 필살기는 누가 더 진짜 같은 가짜이며, 연기를 더욱 더 그럴 듯하게 펼치는가를 혹독하게 경연하는 무대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간혹 반전에 모든 걸 건 듯한 영화나 소설을 접하곤 한다. 이 소설이 바로 그러하다. 중반까지는 다소 지루하게 흘러가지만, 중반부를 넘어 본격적인 반전 요소가 등장한 뒤부터 이야기는 숨가쁘게 전개된다. 진정성이라고는 일절 없는 인물들 간에 펼쳐지는 치열한 가면극은 이야기의 재미를 한껏 끌어올리는 요소에 해당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가 서로를 속고 속이거나 때로는 뒤통수까지 후려쳐야 하는, 흡사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일부를 고스란히 옮겨늫은 듯싶어 씁쓸함을 자아내게 한다.  



저자  히가시노 게이고

역자  권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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