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본격 술을 부르는 책 '술이 있으면 어디든 좋아'

새 날 2018. 8. 14.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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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 근무하는 미야코, 신기하게도 그녀의 주변에는 술자리 기회가 널려 있다.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동료들과 퇴근 후 함께하는 술자리부터 거래처나 직무상 엮일 수밖에 없는 작가들과도 늘 술은 일의 매개 내지 윤활유 역할을 톡톡히 한다. 그녀가 진정한 술꾼으로서의 면모를 타고 난 건 일단 술자리가 시작되면 한 종류의 술로 그치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다른 종류의 술로 갈아탄다는 점일 테다. 물론 그에 따라 술집도 계속해서 옮겨다닌다. 대단한 주당이다. 게다가 그렇게 퍼부어대도 숙취로 고생하거나 다음날까지 시름시름 앓는 법이란 일절 없다. 진정 부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아주 간혹 필름이 끊겨 일정 시간대의 기록이 싹 사라진 적이 있거나 함께 마시던 동료의 신체에 선명한 멍자국 따위를 남기는 경우가 더러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뒤끝도 깨끗한 편이다. 술로 인해 수많은 에피소드가 만들어진 것인지 아니면 그와 반대로 많은 에피소드 속에서 자연스레 술이 뒤따르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어쨌든 미야코 역시 직무 경험이 쌓여가는 과정 속에서, 아울러 사람들과의 관계가 무르익어가는 시간 속에서 숱한 아픔, 고통, 기쁨 등과 마주하면서 점차 성장해가는데...


제141회 일본 나오키상 수상 작가인 기타무라 가오루의 소설 '술이 있으면 어디든 좋아'는 출판사에서 근무하는 코사카이 미야코라는 커리어 우먼의 성장담을 코믹한 필치로 그리고 있다. 물론 이 책에서 술 이야기를 빠뜨린다면 한 여성의 평범하기 짝이 없는, 특색이라고는 일절 없는 직장과 일상의 그저 그런 이야기로 전락할 공산이 아주 크다. 그만큼 이 책에서 술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하다는 방증이다.



단순히 술을 매개로 이야기의 전개가 이뤄지는 게 아니라 술 그 자체로, 혹은 술자리를 통해 새로운 이야기가 창조되고 여기에 사람들이 껌딱지처럼 들러 붙으며 서로 얽힌다. 술을 이만큼 예찬한 책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주 달달하게 묘사돼 있다. 첫 잔을 맥주로 시작하여 이내 일본의 전통주로 옮겨가고, 마지막엔 칵테일을 종류별로 흡입하면서 맛을 음미하고 평가하는 책속 인물들의 면면을 보고 있노라면 술이 절로 당기지 않을 수 없다.


비록 허구에 불과하지만 어쩌면 술을, 아니 술자리를, 이토록 맛깔스럽게 묘사할 수 있는 것인지, 그들처럼 기능적으로 탁월한 알코올 섭취 능력을 타고나지 못한 나로서는 한없이 부러울 따름이다. 소설속 인물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한 자리에 진득하니 앉아 다양한 종류의 술을 맛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아울러 숙취를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한 사람으로서 소설속 인물들이 그렇게나 많은 양의 술을 마시고도 다음날 거뜬하게 버틸 수 있었듯이 나도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술은 정말로 묘한 매력을 지닌 녀석이다. 적당히만 흡입한다면 이처럼 좋은 놈도 없다. 함께하는 사람들 주변의 분위기를 부드럽고 화기애애하게 만들어 자연스레 끈끈한 관계로 이끌어주는 마법을 부린다. 어색했던 관계도 함께 부딪힌 술 몇 잔만으로 스르르 풀린다. 연인들에게 있어 술은 사랑의 묘약과도 같다. 기쁜 일은 더 기쁘게 해주고, 슬프거나 괴로운 일은 비록 그 순간일지라도 일단 덜어준다.


하지만 무엇이든 지나치면 모자라니만 못 하다는 사실을 제대로 입증하는 것 또한 술이다. 술로 인한 폐해는 개인의 영역을 넘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된 지 이미 오래다. 이 소설 속에서도 술을 과하게 섭취하여 벌어지는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으나, 대체로 코믹한 분위기로 흐르는 바람에 술이 베푸는 이로움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하게 묘사된 경향이 있다. 술을 한껏 예찬해야 하기에 아마도 즐거움의 이면에 도사린 위험을 최소화했으리라.


주인공 미야코는 입사 이후 실연을 겪는 등 누구나 겪는다는 통과의례를 경험하게 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직무에 능숙해지고 인간관계의 폭도 넓어지며 어느덧 술의 깊은 풍미 또한 제대로 헤아릴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맥주와 샴페인, 일본 전통주와 칵테일을 넘어 스코틀랜드 현지에서 직접 수 년 동안 숙성시킨 위스키에 투자할 정도로 그녀와 그녀 주변 사람들의 술에 대한 탐닉은 끝을 모른 채 펼쳐진다.



진정한 술꾼은 술꾼을 알아보는 법일까? 미야코와 동료들은 알코올 중독에 의한 금단 증상을 나타내는 'delirium tremens'라는 이름의 술을 즐기고, 아울러 분홍 코끼리가 그려진 술잔에 술을 따라 마시곤 한다. 분홍 코끼리는 알코올 중독자에게 보이는 환각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으며, 영미권에서는 술집 간판에 이 분홍 코끼리가 자주 활용된다고 한다. 이러한 함의가 담긴 술이 주당들에게 소비된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의 각 지역을 여행할 때면 그 지역에서 생산된 특산주를 반드시 마셔야 직성이 풀리고, 칵테일을 마실 때면 어떤 식재료가 바탕에 깔려 있으며, 혼합된 재료는 또한 무엇인지를 헤아릴 수 있을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그렇다면 이들의 손에 분홍 코끼리가 그려진 술병과 술잔이 들린 건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 아닐까?


일본식 언어유희와 일본 현지 문화 및 용어를 알 수 없는 우리로서는 분명 독자를 웃게 만드려고 쓴 부분인 것 같은데, 웃을 수 없는 데다가 심지어 이해조차 하기 어려운 대목이 많아 다소 아쉬웠다.(번역상의 문제는 아닌 걸로 보인다) 저자는 술을 매개로 출판사에서 고군분투하는 직장 여성 미야코의 성장담을 이야기하고 싶었겠으나, 솔직히 그녀의 성장에는 그다지 눈길이 가지 않고, 오히려 이 책의 소개글에서 언급된 '기승전술'이라는 표현처럼 너무도 맛깔스러운 데다가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술자리가 자주 등장하는 까닭에 이 책을 한 마디로 본격 술을 부르는 소설이라 표현하고 싶다.


오늘 첫 잔은 어떤 술로 시작할까?



저자  기타무라 가오루

역자  오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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