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런던 덕후의 생동감 있는 런던 안내 '건방진 런던에 반하다'

새 날 2018. 8. 12.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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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덕후임을 자처하는 저자는 런던이 무척 매력적인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에게는 여타의 유럽 도시들에 비해 덜 알려진 사실이 못내 아쉬워 이 책을 쓰게 되었다며 서문을 통해 밝히고 있다. 그러고 보니 프랑스 하면 파리, 파리 하면 에펠탑 혹은 개선문 등이 쉽게 연상되곤 하는데, 왠지 런던 하면 당장 떠오르는 무언가가 없긴 한 듯싶다. 기껏해야 우리의 뇌리에 깊숙이 심어진 인식은 좋지 않은 공기며, 맛없는 음식, 그리고 비싼 물가 정도가 아닐까?


도대체 어떤 것들이 저자를 반하게 만든 것인지 궁금증을 참지 못 해 결국 책장을 펼쳐 들었다. 저자의 전략이 일단은 성공을 거둔 듯싶다. 저자는 런던을 올드하지만 멋스럽고, 변덕스럽지만 다양하며, 럭셔리하면서도 스타일리시한 도시라고 단언한다. 그만큼 다양한 종류의 매력이 숨겨져 있다는 의미일 테다. 이를테면 오래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만큼 고상한 데다가 보수 일색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도리어 특이하고 창의적인 측면이 엿보인다는 식이다.


뉴욕 시민들을 뉴요커라는 애칭으로 부르듯이 저자는 런던 시민을 '런더너'라 부르고 있었다. 조금은 억지스러운 데다가 오글거리기까지 한다. 이런 방식이라면 서울 시민은 '서울러'가 되는 게 아닌가. 역시나 저자는 덕후로서의 기질이 다분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저자가 소개한 내용 가운데 우리의 현실과 견주어 가장 부러운 대목은 런던 곳곳에 자리한 공원에서 찾게 된다. 물론 서울에도 공원은 많다. 그러나 우리의 그것과는 차원이 전혀 다르다. 우리처럼 아파트를 짓는다며 기존에 있던 녹지를 걷어내거나 산림을 훼손시킨 뒤 인위적으로 조그만 공원 몇 개 만들어놓은 형태가 아니다. 자연을 그대로 살린, 역사가 꽤나 깊은 큰 규모의 공원들이 시민들에게 개방되어 쉼터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공원에는 사슴 등의 생물들이 뛰어놀 만큼 생태계가 온전하게 보존돼 있으며, 이렇듯 자연이 늘 가까이 있는 런던의 공원은 흡사 다른 세상에 온 것과 같은 일종의 도심속 오아시스를 연상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런더너들은 우리처럼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모두가 똑같은 방식의 패션을 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유행을 좇지 않으면 어딘가 모르게 불안해 하는 모습이 역력하지만 런더너들은 오히려 저마다 개성 있는 패션을 추구하는 경향이 크다.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해주고 각자의 개성을 자신감 있게 표출하는 런더너들의 여유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특히 빈티지 패션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유독 많다는 사실은 이채롭다. 이 빈티지 문화는 패션뿐 아니라 음악, 영화, 가구, 자동차 등 런더너의 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마도 오랜 역사와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시민들 저마다의 DNA에 깊숙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맥주 문화의 발달은 유럽의 많은 국가들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물에 석회 성분이 많아 식수로써 적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국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술, 특히 맥주의 소비량이 가장 많은 나라 가운데 하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발달하게 된 문화가 펍이다. 낮에는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고 밤에는 맥주를 마실 수 있으며, 일부는 숙박 기능을 하는 곳이 이른바 퍼블릭 하우스, 즉 줄임말로 펍이다.



런던의 직장인들에게는 퇴근 후 이 펍에 들러 맥주 한 잔씩 마시는 일이 일상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우리가 선술집 등에서 소주 한 잔씩 걸치고 그날의 회포를 푼 뒤 퇴근하는 현상과 비슷한 맥락이다. 다만, 이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골수에 가깝다. 꼭 술 때문이라기보다는 펍 문화의 역사가 워낙 오래된 터라 일종의 사랑방처럼 자리매김되어 있고 특정 펍에 가면 으레 누군가를 만나거나 볼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


펍 문화는 스포츠, 특히 축구 경기가 있는 날이면 절정에 이르곤 한다. 예컨대 맨체스터와 리버풀처럼 라이벌 도시 간 치열한 시합이 있는 날이면 펍의 분위기는 후끈 달아오르기 십상이다. 이렇듯 직장을 중심으로 하든, 아니면 지역을 기반으로 하든, 혹은 취미를 매개로 하든, 오프라인을 통해 자연스레 커뮤니티를 즐길 수 있는 런던만의 오래된 펍 문화는 우리에겐 부러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근래 대도시를 중심으로 벼룩시장과 비슷한 마켓이 설치되어 청년들의 일자리를 늘리거나 스타트업을 돕고, 시민들로 하여금 양질의 제품을 값싸게 구입할 수 있는 채널이 되어주거나, 문화를 향유하게끔 하는 걸 간혹 보게 된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도 낯 익다. 런던에는 마켓 문화의 전통이 제법 오래됐다. 규모도 그렇거니와 이곳에서 취급하고 있는 문화 상품의 다양성 측면에서도 우리를 압도한다.



짐작컨대 런던 등 해외 유수의 도시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들을 우리가 벤치마킹하여 들여온 게 아닐까 싶다. 비슷한 문화 상품으로는 각종 축제를 사례로 들 수 있다. 런던은 다양한 인종이 상주하는 만큼 문화적 다양성이 살아있는 도시이다. 그러다 보니 런던 도심에서는 1년 내내 온갖 종류의 축제가 개최되고 있으며, 많은 시민과 관광객들이 이를 즐긴다. 우리도 수년 전부터 각 지자체마다 지역 특색에 맞는 축제 상품이 개발되는 등 비슷한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입헌군주제인 영국에서는 누구나 하루에 3차례 이상 차를 마실 만큼 차 문화가 발달해 있다는 점도 이채롭다. 다만, 전통 귀족 문화의 한 갈래인 이 차를 온전히 즐기기 위해서는 꽤나 많은 비용이 소요된다는 점만은 감안해야 한다.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이 곳곳에 곁들여져 있어 생동감이 더해지고, 도입 부분에서 독자들의 호기심을 끌어모으는 데는 일정 부분 성공을 거두지만, 글은 후반부로 갈수록 긴장감과 흥미가 떨어진다. 왜 그럴까 곰곰이 되짚어 봤다. 특정 브랜드나 상점을 안내하는 내용 일색의 글에, 지나치게 소비 위주로 흘러가고 있음이 감지된다. 가뜩이나 물가가 비싸다는 런던이다. 그렇다면 이곳의 덕후가 되기 위해선 도대체 얼마나 많은 소비를 해야 하는 걸까? 문득 궁금해진다.



저자  이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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