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멍때림에 주저하지 말자 '잠시 혼자 있겠습니다'

새 날 2018. 7. 8.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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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고 편리한 온라인 메신저에 비해 펜으로 직접 꾹꾹 눌러쓰는 편지는 더 느리고 더 사려 깊은 작업이 되게 해준다. 왜일까? 편지를 쓰는 시점과 받는 시점 사이에는 제법 긴 시간의 간극이 놓여 있는 탓이다. 잠깐 동안 유보된 이 침묵의 시간이 편지의 내용을 더욱 깊이있고 소중하게 만들어주며, 이를 쓰고 받는 이들의 감정에도 좋은 영향을 미친다. 


마찬가지로 요즘엔 글을 작성할 때 펜으로 쓰기보다 디지털 도구를 활용하는 경향이 더 많지만, 영화 '변산'에서 작가 정선미(김고은)는 부러 노트에 펜으로 쓱쓱 적어내려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복붙(붙여넣기와 복사하기), 그리고 삭제가 자유로운 도구에 비해 펜으로 작성하는 방식은 불편하기 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물론 멋을 부리려 함은 결코 아니다. 정선미라는 캐릭터는 절대로 그럴 만한 위인이 못 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불편함이 되레 우리로 하여금 생각과 행동을 더욱 깊이있게 해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2006년 세계 인구의 18%가 온라인에 연결되어 있으며, 2009년에는 그 비중이 25%, 그리고 2014년에는 41%까지 치솟았다. 2020년이면 200조에서 500조 개의 사물들이 인터넷에 연결될 전망이다. 이른바 초연결 시대다. 스마트폰만 손에 쥐고 있으면 비록 혼자 멀리 떨어져 있는 상황일지라도 세상과 늘 연결되어 있는 상태가 되곤 한다. 물리적으로는 홀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군중 속에 함께있는 셈이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사람의 얼굴을 보며 이야기하기보다 매일 밤 늦게까지 이를 보느라 퀭해진 눈으로 스마트폰의 액정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우리의 삶은 점점 더 분주해져간다. 그러나 테크놀로지의 깊숙한 일상 침투로 우리의 삶은 분명히 한결 편리해진 것 같은데, 왜 이토록 공허하기만 할까? 캐나다의 유명 논픽션 작가이자 미디어와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저자 마이클 해리스는 헝가리 감옥의 독방에서 무려 7년 동안 갇혀 있다가 살아 돌아온 이디스 본 박사의 수기를 읽은 뒤 초연결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야말로 어느 누구보다 홀로 있음이 절실함을 깨닫고 이 책을 펴냈다. 


저자는 인터넷 플랫폼을 기반으로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창작한 콘텐츠를 돈 한 푼 안 내고 활용하면서 엄청난 권력을 행사하고 부를 거머쥔 이른바 플랫폼 기업의 득세가 우리로 하여금 자발적 디지털 노예를 만들고 있다며 우려한다. 플랫폼 기업이란 회사가 공장을 지어놓고 우리 같은 사용자들이 이곳에서 자발적으로 노동을 제공하는 시스템을 말한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내가 글을 쓰고 동영상을 만들었는데, 정작 수익은 플랫폼 회사가 모두 가져가는 식이다. 보스턴 및 MIT 대학 교수인 마셜 반 알스타인은 앞으로 10년 안에 구글이나 아마존 같은 플랫폼 기업이 기존의 것들을 제치고 최고 기업의 반열에 오를 것이라 전망한다.


플랫폼 상에서는 수많은 사용자들이 무수한 콘텐츠를 생산해낸다. 이러한 홍수 속에서 우리는 길을 잃기 십상이다. 하지만 너무 걱정 마시라. 온라인상에서의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은 차곡차곡 쌓여 빅데이터화되고 있고, 플랫폼 기업은 이를 통해 우리에게 친절하게 길 안내를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온라인쇼핑몰에서 무언가에 관심을 갖고 검색하면 이후로 그와 관련한 상품이 배너 광고 속으로 쏙 들어와 이동할 때마다 내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제발 이 제품을 사달라고 애걸복걸한다. 


ⓒ한국일보


영화를 관람하고 싶은데 딱히 뭘 봐야 할지 모르겠거나 어떤 책을 골라야 할지 헷갈릴 때에도 우리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온라인 세계가 수십억에 이르는 또 다른 이들의 선택을 모아 추려낸 뒤 그 가운데 아주 그럴 듯한 취향을 우리에게 전달해주기 때문이다. 영문도 모른 채 남들이 보거나 즐기고 맛보는 건 반드시 함께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세상이 돼버렸다. 내가 아닌, 우리 모두가 좋아하는 종류의 것으로 말이다. 개인적 취향은 온 데 간 데 없고 대중적인 취향에 우리 스스로를 종속시키는, 말 그대로 자발적 노예가 돼가고 있는 셈이다. 


"20세기에 똑같은 음식과 오락을 대량으로 생산한 맥도날드와 디즈니 같은 회사들이 시작한 일을 21세기에는 공유된 취향을 대량으로 만들어내는 구글과 아마존 같은 회사가 이어받았다."


구글지도는 우리로 하여금 길을 잃지 않고 목적지까지 편안하고 안전하게 찾아갈 수 있게끔 도움을 준다. 나와 같은 길치에겐 정말로 유용한 도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저자는 획일적 시각의 지도 앱에 대해서도 우려의 목소리를 높인다. 인간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동요와 낯섦 그리고 야성이 필요한데 획일화된 구글 지도가 이를 방해하고 있다는 관점이다. 어릴 적 낯선 길에 들어섰다가 우여곡절 끝에 그로부터 벗어나 뒤늦게 성장을 맛보게 되듯 저자는 혼자서 훌쩍 떠나고 길을 잃어봄으로써 비로소 구글지도가 제공하는 명백함과 손쉬움에 저항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자연학자 로버트 마이클 파일의 입을 빌리자면 구글지도로의 획일화 현상은 곧 '경험의 소멸'을 일컫는다. 


"우리가 인생의 어느 부분 동안 사라지고 추적되지 않을 권리를 고집하는 한 전면적인 디스토피아는 오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유전자 속에는 노화 프로그램이 장착되어 있다. 생식기간의 절정이 지나면 반드시 노화하고 소멸하게 되는데, 이른바 텔로미어라는 몸속 기관이 이를 담당한다. 그런데 AI를 만들어낸 인류는 이제 홀로된다는 것의 최종 기착지인 죽음을 향해서도 도전장을 내밀 태세다. 우리를 만든 신이 유일하게 인간을 부러워한 대목이 다름 아닌 죽음이라고 한다. 즉, 이 세상에 죽음이라는 최종적 고독이 없다면 벌써부터 재앙이 닥쳤을 것이다. 하지만 끝을 모르는 인간의 욕심은 이 불멸의 영역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기술 발전의 수혜인 수명 연장이 되레 수많은 문제점을 노정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시도는 향후 인류를 어떤 모습으로 바꿔놓게 될지 자못 우려스럽기까지 하다.  



혼술, 혼밥, 혼영 등 무엇이든 나홀로 즐기는 게 대세로 떠오르는 요즘 세상이다. 물론 이러한 배경에는 n포세대로 불리는 청년들의 녹록지 않은 삶, 이로부터 떼려야 뗄 수 없는 비혼 그리고 1인 가구의 증가라는 씁쓸한 현실과 맞물려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른바 초연결 시대로 불릴 만큼 촘촘하게 연결된 관계로 인해 피로감을 호소하며 관태기에 빠져든 이들이 그로부터 벗어나고픈 욕망을 드러내는, 다분히 의도적인 생활 패턴이기도 하다. 멍때리기 대회가 성황 리에 개최되고 있고, 스마트폰 등을 매개로 연결된 세계로부터 의도적으로 배제된 환경에 놓이기 위해 별도의 비용이 들 만큼 우리가 사는 곳은 복잡다단한 세상이다.


20세기에 태어나고 성장, 어느덧 21세기로 넘어온 세대에게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대변되는 작금의 빠른 변화에 현기증을 느끼며 못내 불안감으로 와닿을지도 모를 일이다. 반면 태어나자마자 손에 스마트폰이 쥐어진 요즘 세대에게 이는 그냥 자신의 신체 일부처럼 자연스레 와닿으며, 모든 것들이 초연결된 온라인화된 세상이 오히려 편안함으로 다가올 테다. 즉, 어차피 세상은 변화해 나갈 것이고, 인류 또한 그에 걸맞게 끊임없이 진화해 갈 테니 사실 이를 향한 염려는 세상사의 변곡점마다 비명을 질러댔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오늘날까지 삶을 질기게 이어온 인류처럼 그저 기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기성세대였던 소크라테스가 당시 젊은이들을 향해 "요즘 것들은 참 싸가지가 없다"고 일갈했듯이 과거 세대가 작금의 변화에 대해 어지러움증을 호소하는 현상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다만, 저자가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사물이 인터넷망으로 촘촘하게 연결되고 있고 우리 또한 그 안에 고스란히 갇힌 현실이 되어가는 상황에서, 즉 홀로 있음의 상실 시대를 맞아 혼자만의 시간이 갖는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는 대목은 귀 기울여볼 만하다. 


온라인 메신저가 아닌 펜으로 편지를 직접 꾹꾹 눌러 쓰거나 디지털 도구가 아닌 펜으로 글을 적어내려갈 때 우리는 한 박자 더뎌지고 쉼을 누리며 차분함을 체험할 수 있듯이 홀로 있음으로써 스스로 고립되고 이를 통해 성장해간다. 참신한 아이디어와 영감을 얻을 수 있음은 홀로 있음이 주는 이득 가운데 하나다. 무뎌진 감각을 날카롭게 다듬는 것 또한 홀로 있음을 통해 누릴 수 있는 혜택이다. 우리의 삶에는 쉼이 답답한 현실속 숨구멍이 되게 해주듯이 초연결 시대에는 다분히 의도적인 홀로 있음이 우리를 한 걸음 발전시키고 성장시키며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게 해준다. 그러니 멍때림에 주저하지 말자.



저자  마이클 해리스

역자  김병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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