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저냥

생존운동이 내게 허락해준 축복

새 날 2018. 7. 6.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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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초등학교 교과 과정 안에는 수영이 포함돼 있다. 이른바 생존수영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물에 대한 적응력 및 위기 상황 발생시 대처 능력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의무화된 과정이다. 본인의 흥미나 의사와는 관계 없이 수난 사고를 당했을 경우 스스로 이에 대처하고 생존하는 법을 몸에 체화시킬 요량으로 초등학생이라면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배워야 하는 일종의 통과의례다. 몸에 체화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여부는 위기 상황에서 그 결과를 극명히 갈리게 하는 핵심 인자다. 따라서 이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내가 틈틈이 짬을 내어 하는 운동 역시 앞서의 수영과는 그 성격이 판이하지만 어쨌든 생존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결코 즐거워서 하는 것도 아니고, 아울러 대단한 성취 의욕을 느끼거나 무슨 특별한 동기에서 비롯된 행위는 결코 아니다. 솔직히 표현하자면 오로지 생존해야 한다는 절박한 이유 때문에 이를 할 뿐이다. 게다가 사실 운동이라고 말하기엔 굉장히 민망한 수준이다. 하천변을 걷거나 가볍게 뛰는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나는 농담 삼아 이를 숨쉬기 운동이라 빗대어 표현하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조차도 내겐 대단히 힘에 부치는 경우가 많다. 숨을 헐떡거리거나 비오듯 땀을 흘릴 때면, 특히 요즘처럼 본격적으로 기온이 높아질 때면 더더욱, 꼭 이렇게까지 스스로를 힘들게 해야 하나 하는 회의감이 밑바닥부터 스멀스멀 기어올라올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너무 힘이 드는 바람에 당장 때려치우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던 적이 부지기수다. 내가 살면 얼마나 오래 살 것이며, 아울러 얼마나 건강하게 살겠다고 지금 이 귀중한 시간을 이렇게나 힘이 들고 의미 없는 시간으로 허비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까지 들곤 하는 것이다. 


 

나중은 나중일 뿐 미래가 온다는 보장도 결코 없는 불확실성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한 판국이거늘, 이를 기회비용으로 따지자면 엄청난 손실로 다가올 것 같았다. 물론 누구나 짐작하듯이 정말로 하기 싫으니까 별의별 이유를 갖다 붙이면서 자꾸만 합리화하거나 명분을 쌓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기 합리화를 통해 힘들어하는 나의 육체를 구원해볼까 하는 유혹에 골백번도 더 흔들렸던 게 사실이니 말이다. 그런데 비록 힘에 부치고 별 의미도 없는 데다가 보잘 것 없어 보이기까지 하는 운동이라고 하지만, 이를 그만두지 말아야 할 이유 가운데 하나를 최근 아주 우연한 기회에 발견했다. 


지금보다 나이가 더 든 뒤에도 건강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운동을 해야 한다는 표현은 차마 식상하여 입 밖으로 꺼내기가 민망하다. 설득력이 떨어진다. 재미도 없다. 감동 따위는 더더욱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를 생존운동 속으로 내몰고 있는 걸까? 내가 생존운동을 해온 지는 어언 10년이 넘었다. 처음 10년 동안은 헬스장에서 영혼 없는 과정을 쳇바퀴 돌듯 반복하였고, 이후로는 동네 하천변을 걷거나 뛰는 방식으로 소화하고 있다. 물론 운동 장소를 하천변으로 바꾼 뒤로는 날씨나 대기 환경을 핑계로 자꾸만 빼먹으려는 경향성이 생겼다. 일종의 잔꾀를 부리고 있는 셈이다. 왜 아니겠는가 싶다. 몸뚱아리가 일단 편하고 싶은 건 만고불변의 진리 아니겠는가.


ⓒ코메디닷컴


언젠가 간만에 만난 절친 녀석이 나를 보더니 씩 웃으며 이런식의 말을 툭 내뱉는다. 


"아무개야, 웬만하면 옷 좀 사입어라. 같은 옷 입은 걸 벌써 10년째 보는 것 같다" 


자식, 10원 한 장 보태준 적도 없으면서 오지랖은 참으로 광활하구나. 특별히 의식하지 않아 몰랐는데, 내 옷이 벌써 10년 이상을 나와 함께했던 것인가? 뭐 사실 딱히 필요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아울러 유행을 타지 않고서야, 그리고 여전히 멀쩡하건만 굳이 옷을 새롭게 구입해서 입어야 할 필요성을 느낄 겨를이 없지 않겠는가. 그러다 보니 10년가량 같은 옷을 입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철이 바뀔 때마다 그에 걸맞게 옷을 바꿔 입으니 10년 이상 늘 같은 옷을 입어도 지겹다거나 이젠 바꿔야겠다는 욕구가 그다지 샘솟지 않는다. 이런 나의 습성이 답답하게 느껴지셨던지 어머니께서도 간혹 앞서 언급한 그 친구와 비슷한 말씀을 하시곤 한다. 더 나아가 옷을 직접 구입하여 내게 건네주신 적도 있다. 난 그럴 때마다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모른 척 고맙게 받아 입곤 했다. 이게 웬 떡인가 싶었던 거다. 그런 걸 보면 내가 이런 쪽으로는 참 무심하기는 한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된 데엔 앞서 언급한 생존운동이 한 몫 단단히 거든다. 


 

운동을 할 때마다 유독 힘이 드는 바람에 비록 욕지기를 내뱉어가며 이를 악물고 어렵사리 이겨내고 있지만, 그래도 이를 꾸준히 계속해온 덕분에 신체의 외형을 일정한 수준으로 유지해올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체중과 허리둘레가 10년이라는 긴 세월 속에서도 큰 출렁임 없이 비슷한 숫자를 유지해올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이 생존운동 덕분이라 생각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어느덧 두 아들이 폭풍 성장, 덩치가 나와 엇비슷해지거나 더 크게 자란 모습을 바라보면서 내심 흐뭇해지곤 하는데, 이젠 이 녀석들과 옷을 공유해 입기도 한다. 


생존운동, 물론 당장 힘이 들고 어려운 일임에는 틀림없다. 너무 힘에 부칠 때는 먼 미래를 위해 무턱대고 지금의 이 귀중한 시간을 허비해야 하는가 하는 극단의 느낌마저 드는 경우도 허다하다. 당장 그만두고 싶은 욕망이 내면에 또아리를 튼 채 거칠게 나를 노려보곤 한다. 그러나 안팎으로 급격한 신체적 변화를 겪게 되는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이래 10년 이상 같은 옷으로 의생활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울러 특별히 아들 녀석들과 함께 이 옷 저 옷 바꿔 입어가며 젊음을 공유할 수 있다는 건 어쩌면 생존운동이 내게 허락해준 유일한 축복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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