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우리 모두는 노무현으로부터 빚을 지고 있다

새 날 2018. 6. 17.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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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햇살이 제법 따갑다. 하지만 저녁 무렵이면 적당히 상쾌할 정도의 차가운 바람이 온몸에 부딪혀 온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요즘 기후는 좀체 종잡을 수가 없다. 급작스레 더워졌다가도 비구름이 한 번 지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서늘한 기온으로 변모하기 일쑤이니 말이다. 비가 오는 추이도 변화무쌍하기 짝이 없다. 적도 부근의 열대 지역에서나 등장할 법한 스콜처럼 한바탕 쏟아붓고는 조용히 사라지곤 한다. 한반도가 기후 변화의 영향권에 들어섰노라는 과학적 전망이 결코 허튼 소리는 아닌 듯싶다. 실제로 봄과 가을은 갈수록 짧아지고 있고, 여름과 겨울만이 그들의 존재감을 강하게, 혹은 아주 독하게 드러내고 있는 모양새다.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는 최근의 기후 변화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변화무쌍하다. 대외적으로는 평창올림픽을 기점으로 점화된 남북한 관계 개선의 불씨가 남북정상회담이라는 형태로 진화하더니 급기야 북미정상회담으로까지 이어지게 하였고, 한반도 비핵화를 전제로 한 이 땅의 항구적인 평화체제로서의 가능성마저 활짝 열어놓고 있다. 대내적으로는 6.13 지방선거가 치러지면서 또 다른 형태의 놀라운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여당이 전례 없는 압승을 거둔 것이다. 광역단체장의 경우 보수의 텃밭이라 불리는 대구 경북 지역과 제주도를 제외한 전 지역에서 더불어민주당 출신 인사들이 석권했다. 국회의원 보궐선거 역시 마찬가지다. 총 12석 가운데 11석을 더불어민주당이 가져 갔다. 어디 그 뿐이랴. 전체 17명을 뽑은 교육감 선거에서도 진보 진영이 14석을 차지하며 압승을 거뒀다. 이번 선거 결과가 의미하는 바는 상당하다. 무엇보다 과거 더불어민주당의 발목을 잡아 온, 호남을 기반으로 한 지역 정당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 비로소 명실공히 전국 정당으로서의 위용을 갖추게 됐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사회의 오랜 병폐 가운데 하나인 지역주의의 극복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1995년에 처음 실시된 전국 동시 지방선거 이후 더불어민주당이 부울경 지역 전체를 석권한 건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다.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기꺼이 온몸을 내던졌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고군분투하던 모습을 어른거리게 하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1992년 14대 총선, 1995년 부산시장 선거, 1996년 15대 총선, 그리고 2000년 16대 총선까지, 오로지 우리 사회의 망국병 가운데 하나인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당시 야당의 무덤이었던 부산 지역에 출마, 계란으로 바위를 치려고 했던 그는 연거푸 낙선하고 만다.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칭은 이 때 얻게 됐다. 16대 총선 낙선 직후 노무현은 "농부가 밭을 탓할 수 없다"며 또 다시 훌훌 털고 일어날 것임을 공언했다. 


ⓒ서울신문


농부가 밭을 탓할 수 없다던 당시로부터 어느덧 16년의 세월이 흐른 2016년, 마침내 노무현 전 대통령이 뿌린 씨앗이 발아하고 새싹을 틔울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해 치러진 20대 총선에서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지역 정당의 멍에로부터 벗어나 모처럼 전국 정당으로서의 가능성을 내비친 것이다. 그로부터 다시 2년이 흘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던진 무수한 계란 세례에 힘입어 꿈쩍도 않을 것만 같던 바위에 드디어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짧은 2년 동안 대한민국 사회에는 너무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무엇보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다'라고 힘주어 말하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훈처럼 깨어 있는 시민들에 의해 불의한 권력이 권좌로부터 끌어내려지고, 노무현 대통령과 뜻을 같이해 온 문재인 대통령이 새로운 국가지도자로 우뚝 섰다. 아울러 노무현 대통령을 늘 그림자처럼 보좌하며 마지막까지 그와 함께하고, 서거 이후에도 봉하마을에 남아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며 부단히 애를 썼던 또 다른 노무현들이 이번 선거를 통해 지역 주민들의 선택과 부름을 받게 됐다. 



6.13 지방선거에서 궤멸 직전의 처지로 내몰린 이른바 자칭 보수 세력은 자신들의 패배를 서로에게 떠넘기고 있는 모양새다. 계란으로 바위를 부수기 위해 자신의 몸이 으깨어지면서도 농부는 결코 밭을 탓해서는 안 된다던 그 분의 담대하고 당당하던 모습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물론 그들의 판단은 대단한 오판이자 착각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의 결과를 만든 건 여당도 야당도 아닌, 지난 촛불 혁명 과정에서 보았듯 노무현 대통령의 유훈인 오롯이 깨어 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 덕분이다. 


그대들에게는 노무현의 강력한 업그레이드 버전인 문재인이라는 인물을 대통령으로 직접 만들어내고, 이제는 그 여세를 몰아 노무현 대통령이 살아 생전에 그토록 극복하기를 바랐던 공고한 지역주의마저 균열을 일으키면서 일정한 방향으로 일관되게 향하고 있는 그 생생한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가? 자칭 보수 그대들은 단지 청산되어야 할 적폐 세력에 불과하기에 국민들의 선택과 부름을 받지 못했을 뿐, 누가 누구를 탓한다는 건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에 다름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을 향한 국정지지도가 최근 80%를 웃돌고 있다. 때문에 이번 선거 결과가 문재인 대통령의 높은 지지도에 힘 입은 덕분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결코 틀린 분석은 아니다. 깨어 있는 시민들은 위정자란 무릇 어떠한 가치관과 신념을 지녀야 하며, 어떤 됨됨이를 갖추고 있어야 하는지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살아 생전 미처 완성하지 못 한 사람 사는 세상은 어느덧 그의 희생을 밀알 삼아 뜻을 함께하는 이들에 의해 시즌2의 형태로 이어가고 있는 와중이다. 


ⓒ국민일보


지난 14일 오전 경기도 파주시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서 열린 남북 장성급 회담에서 북측 수석대표인 안익산 중장이 2007년 2차 남북정상회담 당시 고 노무현 대통령께서 기념 식수한 소나무의 최근 사진을 공개했다. 아주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는 모습이었다. 노무현 그가 심은 묘목이 이렇듯 멋진 모습으로 성장, 남북관계를 평화로 이끌어 가고 있듯이 그가 대한민국 사회에 뿌린 씨앗들 역시 어느덧 싹을 틔우고 점차 굳건해지고 있는 모습이다. 우리 모두는 이의 수혜자다. 때문에 있을 때 지켜드리지 못하고 그를 떠나 보낸 뒤 뒤늦게 소중한 사람이었노라며 후회하는 우리 모두는 어쩌면 노무현으로부터 큰 빚을 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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