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아마존 CEO는 왜 '워라밸'을 평가절하하는가

새 날 2018. 5. 13.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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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은 근래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화두가 되고 있는 용어 가운데 하나다. 이는 개인의 일과 생활이 조화롭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지구상에서 가장 돈이 많은 인물이자 혁신의 아이콘이기도 한 아마존의 CEO 제프 베조스가 이 '워라밸'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여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 달 배를린 '악셀 슈프링거 2018 시상식'에서 혁신상을 수상하는 자리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과 생활의 균형을 찾으려 하지 말라. '워라밸'은 인간을 지치게 한다.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를 추구할 경우 다른 하나를 희생해야 하는 거래 관계를 기정사실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과 생활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이며, 이 둘을 시간적 제약 속에서 대립하는 관계로 구분해서는 안 된다. 즉, 일과 일 이외의 생활은 보다 포괄적이고 거시적인 관계여야 한다. '워라밸'이 아닌 'Work and Life Harmony’를 추구해야 한다. 일과 생활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 가정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면 에너지가 충만한 상태로 출근할 수 있다. 그리고 직장에서 즐겁게 일한 뒤엔 역시 건강한 에너지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중앙일보


그렇다면 '워라밸'은 어떠한 연유로 근래 대중들로부터 집중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 걸까? '미생' '열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 등의 기업 문화를 다루는 드라마와 영화 등 문화 콘텐츠가 유독 관객들로부터 호응을 얻으면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사실이 이를 간접적으로 설명한다. 아울러 근래 취업준비생을 뜻하는 '취준생'에 빗대어 퇴직을 준비하는 직장인을 표현한 '퇴준생', 회사와 개인의 삶이 거의 일체화된 직장인을 뜻하는 '회사인간'의 반대 개념으로 이를 빗대어 묘사한 '퇴사인간' 등의 신조어가 급속히 확산되는 현상도 비슷한 맥락이다.


'월화수목금금금'으로 대변되는 잦은 야근과 초과 근무 등 높은 업무 강도, 덕분에 매주 월요일이 돌아올 때마다 월요병을 앓아야 하는 직장인들, 노오력이 부족하다면서 실적 부진을 꾸짖고 윽박지르거나 독촉하기 바쁜 상사, 수직적이며 소통이 불가능한 상명하복의 일방통행식 조직문화가 횡행하는 이상 영화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의 주인공 아오야마(쿠도 아스카 분)가 살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일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인지 불분명하다면서 하소연하는 장면은 결코 남의 이야기 만으로 치부할 수 없는, 바로 우리 자신의 가장 현실적인 모습이 아닐까 싶다. 



이렇듯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직장인들의 다수는 개인적인 삶의 대부분을 조직에 일방적으로 희생해온 경향이 크다. 워라밸은 이러한 문화와 환경으로부터 탄생한, 일종의 반작용 현상에 가깝다. 삶의 질을 중요시하게 생각하는 최근의 경향성은 우리의 일과 생활을 연거푸 돌아보게 한다. 앞만 보며 숨가쁘게 달려온 우리에게 자꾸만 뒤를 돌아보도록 종용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워라밸은 회사의 전근대적인 문화를 개선하거나 일소하고 일과 개인의 생활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양립 가능하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아마존 제프 베조스의 주장처럼 일과 생활을 시간적 제약 속에서 대립하는 관계로 구분 짓자는 게 절대로 아니다. 월화수목금금금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삶이 아닌, 적어도 살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일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인지 정도는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는 수준의 인간적인 삶을 살기를 바라는 것으로부터 출발한 개념이 바로 워라밸인 셈이다. 



그런데 어쩌면 제프 베조스 아마존 CEO의 워라밸을 향한 작금의 삐딱한 시선은 결코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수백 명의 아마존 노동자들이 '아마존은 대가를 지불하라'는 현수막을 든 채 "우리는 미국식 노동 관계를 원한다. 19세기로 되돌아가려는 아마존의 보스를 가지고 있다"고 외치며 제프 베조스의 이날 수상을 반대하는 집회를 개최했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지난 해 독일과 이탈리아의 아마존 물류센터 직원 수 천 명은 임금 인상과 교대 근무 보장, 야근 축소 등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인 바 있다. 


독일 노동조합은 성명서를 통해 “아마존 노동자들은 점점 더 짧은 시간동안 더 많은 성과를 내도록 하는 압박과 상시적인 성과 감독 및 감시에 처해 있다”고 주장한다. 지난 2013년에도 크리스마스 대목을 앞두고 미국과 독일 아마존 직원들이 임금과 장시간 노동 등의 근로 여건을 개선하라며 파업을 벌였었다. 세계 최대의 전자상거래 업체이자 콘텐츠 유통 기업 아마존은 이렇듯 양면성을 띤 회사다. 오늘날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고 우뚝서기까지 직원들의 일방적이며 보이지 않는 희생이 끊임 없이 이어져 왔던 셈이다. 


사소한 사안까지 일일이 직원을 직접 지정하는 방식의 업무를 즐겨한다는 제프 베조스는 자신이 내세운 비전을 이해 못 하는 직원을 그 자리에서 바로 해고하는 등 돌출적인 성품의 인물로 악명이 자자하다. 본사 직원들은 해고라는 두려움 때문에, 물류 및 유통을 담당하는 직원들은 낮은 임금과 형편없는 근로 조건 때문에 불만이 폭발 직전까지 이르렀단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노조총연맹이 세계 최악의 CEO로 제프 베조스를 지목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쯤 되면 그의 '워라밸'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말장난이자 궤변이라 할 만하다. 이제껏 그의 행보 만으로도 설득력은 크게 떨어지고도 남는다. '워라밸'은 곧 노동 조건의 개선을 의미하는 바, 제프 베조스의 전력을 놓고 볼 때 애초 그와는 거리가 멀기에 워라밸을 의도적으로 평가절하하고 나선 정황으로 읽힌다. 일과 생활의 조화는 직원의 직무 만족도나 기업을 향한 충성심, 사기를 진작시키는 도구에 해당하는 까닭에 기업은 우수 인재 확보 차원에서라도 조직원들의 사생활을 배려한 제도나 프로그램 등에 아낌 없이 대처할 필요가 엿보인다. 실제로 많은 기업들이 이에 힘을 쏟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글로벌 공룡 기업 아마존을 총괄 지휘하는 조직 수장의 직원을 향한 마인드와 조직 문화는 여타의 기업들에 비하면 여전히 유연하지 못 한 데다가 현저히 뒤떨어진 것으로 읽힌다. 제프 베조스는 현재 자신이 직접 고용한 직원들뿐 아니라 전 세계 노동자들로부터 동시에 세계 최악의 CEO로 평가 받고 있다. 'Work and Life Balance'가 아닌 'Work and Life Harmony'를 추구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 도대체 이 두 개념이 뭐가 다르다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때문에 제 눈에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티끌 만을 탓하는 그의 워라밸 관련 주장이 달가울 리 만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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