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유쾌함과 뭉클한 감동 '아이 캔 스피크'

새 날 2017. 9. 22.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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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급 공무원인 박민재(이제훈) 주임은 어느 날 새로운 곳으로 발령을 받게 된다. 구청 민원 창구였다. 이전에 근무하던 곳에서 주변으로부터 유능함을 인정 받았던 그는 철저한 원리원칙주의자였다. 그런 그 앞에 복병이 나타난다. 시장 상인으로서 20년 동안 온갖 종류의 민원을 양산하며, 구청 직원들 사이에서 이른바 민원계의 블랙리스트로 떠오른 도깨비 할매 나옥분(나문희) 여사가 그와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전혀 다른 성향의 두 사람, 그 가운데 한 사람은 날카로운 공격 본능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철저한 방어에 공을 들이는 등 서로 불꽃을 튀긴다. 나옥분 여사를 이미 과거에 경험했던 다른 직원들은 그녀의 등장에 모두들 혀를 내두른 채 이를 피하기에 급급한 반면, 박 주임만큼은 그의 직무 철학을 앞세워 정면 돌파에 나선 모양새다. 한편 자유롭게 영어를 구사하고 싶었던 나옥분 여사는 어학 학원에 등록하는 등 영어 공부에 열의를 내비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가 않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다. 좌절을 거듭하던 와중에 학원에서 우연히 원어민과 유창하게 영어로 대화하던 한 사람을 만나게 되고, 알고 보니 그는 구청 민원 담당 박 주임이었다. 민원으로 악연을 맺은 두 사람은 이번에는 영어를 매개로 인연을 이어가게 된다. 누구보다 영어 공부에 열의를 보였던 나옥분 여사의 끈질김에 두 손 두 발을 모두 든 박 주임은 결국 그녀의 개인 교사가 되기로 자처하는데...



시장 내에서 남의 일에 이것 저것 참견하는 등 오지랖 하면 주변에서 늘 손에 꼽히던 나옥분 여사였지만, 영어를 구사하고자하는 절실함은 그녀에게 있어 유독 몸에 밴 태도 가운데 하나였다. 남 모르는 사연이 존재했던 까닭이다. 그녀의 영어 학습에 대한 열의는 경이로움 그 자체다. 여기에 실력을 겸비한 스승의 도움이 더해지니 그녀가 그동안 공들여온 노력들이 비로소 날개를 달게 된다. 



이 작품은 지난 2007년 미 하원 의회 공개 청문회가 개최되면서 '위안부 사죄 결의안(HR121)'이 통과됐던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한다. 극 초반에는 출연 배우들 각기 특유의 코믹 연기가 버무려지면서 가볍게 진행되지만, 나옥분 여사가 왜 영어를 배울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극중 배경이 밝혀지고, 중후반으로 치달을수록 결코 쉽지 않았던 청문회 준비 과정과 미국 현지에서의 직접 증언을 통해 여전히 왜곡되어지거나 잘 알려지지 않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의 문제를 이 세상에 다시 한 번 전달하는 등 관객에게 묵직한 감동을 선사해준다.



내용을 전혀 모른 채 영화의 제목인 '아이 캔 스피크'를 접했을 당시 언뜻 떠오른 작품 하나가 있다. 인도 영화 '굿모닝 맨하탄'이다. 



평소 영어 울렁증을 느끼던 전업주부가 유독 가부장적인 사회 분위기 탓에 남편으로부터 영어도 못한다면서 무시를 당하고, 심지어 자녀들로부터 같은 이유로 멸시를 당한 뒤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과감히 미국 심장부로 뛰어들어가 영어를 배워 개인적인 성취를 이룬다는 내용의 영화다.   



그러나 두 작품 공히 영어를 배우고자 하는 주인공들의 절실함은 공통분모임이 분명하나 그 방향성과 무게감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나옥분 여사는 13세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뒤 주변 사람들의 차가운 냉대와 시선을 감수해야했으며, 심지어 가족들로부터 버림 받은 채 외로운 삶을 살아야했다. 이를 꼭꼭 숨기고 살아오던 할머니는 절친인 정심(손숙)의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자 마침내 세상에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기로 작정한다. 



가족들마저 외면해온 슬픈 사연을 간직한 그녀는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절규하는 일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외롭고 힘겨웠던 그녀의 삶을 감히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그나마 이웃 시장 상인인 진주댁(엄혜란)의 진정 어린 위안과 다독임은 그녀의 상처를 보듬어줄 뿐 아니라 관객들에게까지 따뜻한 위로로 다가오게 한다. 영화 '박열'에서 아나키스트로서 항일 운동에 매진했던 박열을 열연한 배우 이제훈이 이번에는 일본군 위안부의 아픈 상처를 전 세계에 알리고 일본의 만행을 낱낱이 까발리는 일등공신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박철민 등 조연 배우들의 깨알 같은 코믹 연기, 뭉클한 감동 그리고 묵직한 메시지까지.. 삼박자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는 매우 좋은 작품이다. 가족 영화로써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감독  김현석


* 이미지 출처 : 네이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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