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미국판 '악녀'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아토믹 블론드'

새 날 2017. 9. 3.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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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소련에 의해 형성된 이래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던, 극명하게 갈린 양 진영의 냉전 체제는, 베를린 장벽의 붕괴 조짐과 함께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때는 바야흐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해인 1989년이다. 냉전 체제의 종식을 앞두고 흡사 마지막 화려한 불꽃축제를 벌이기로 작정이라도 한 양 미국과 소련을 위시한 강대국들의 첩보전은 그 어느 때보다 불꽃을 튀긴다. 그 주 무대는 다름아닌 냉전의 상징과도 같은 곳인 베를린이다. 이렇듯 당시 베를린은 강대국들의 이념과 세력 다툼의 장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영국의 정보 기관 M16의 핵심 요원이 베를린에서 살해된다. 그가 가지고 있던 정보는 핵폭탄급의 위력을 지닐 만큼 치명적이었는데, 그가 살해됨과 동시에 이중 스파이가 해당 정보를 훔쳐 달아나는 사건이 벌어진다. 곤혹스러워하던 영국은 이의 해결을 위해 M16 내 최고의 요원으로 알려진 '로레인(사를리즈 테론)'을 투입하기로 결정한다. 



세계 각국의 스파이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치열한 눈치 작전을 펼치며 해당 정보를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돼있었으며, 로레인은 그녀 나름대로 동독과 서독을 오고 가며 소련 스파이들과 열전을 펼치는 등 자신에게 주어진 미션을 충실히 수행하던 와중이다. 그러나 미처 예상치 못한 음모로 인해 그녀는 미션 수행 도중 목숨을 위협받는데... 



이 영화의 원작은 지난 2012년 출간된 그래픽 노블 '콜디스트 시티'로 알려져 있다. 냉전 체제의 종식을 앞두고 혼란의 도가니였던 당시의 시대상을 베를린 장벽의 붕괴라는 시간적 공간적 배경으로 등장시킨 사실은 관객들의 흥미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베를린 장벽은 동서 베를린 경계선 약 45.1킬로미터에 걸쳐 세워진 콘크리트 벽으로, 1961년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려는 사람들과 동독 마르크의 유출을 방지하기 위하여 동독 정부가 축조했다. 동유럽의 민주화와 그에 영향을 받은 동독의 급진적인 변화는 점차 철의 장막인 베를린 장벽을 무력화시키기 시작한다.



영화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스타일리쉬하다. 1980년대를 상징하는 화려한 원색의 색감이 스크린 위를 끊임없이 장식하며, 고막을 찢을 듯한 폭발적인 록음악이 영화의 배경음으로 깔린다. 특히 형광 색조와 네온 불빛의 조명은 이념에 의해 양 진영으로 갈린 세계와 그를 둘러싸고 치열하게 펼쳐지는 각국의 이권 다툼의 혼란스러운 당시의 시대상을 묘사하는 장치로 활용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에서 강렬한 여전사 '퓨리오사'로 출연했던 '샤를리즈 테론'의 1인 액션 활극이라 칭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그녀의 활약이 유독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고난이도의 액션 모두를 대역 없이 그녀가 직접 소화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에 이어 다시 한 번 걸크러쉬로써의 매력을 한껏 뿜어낸다. 특히 10여분에 달하는 롱테이크 액션은 올해 최고의 액션 시퀀스라는 평을 들을 만큼 독보적인 신으로 꼽힌다. 



얼음이 가득 채워진 술잔과 욕조, 그리고 이를 즐기는 듯한 그녀의 도도하면서도 시크한, 때로는 지친 듯한 표정은, 네 편 내 편이 따로 없을 만큼 서로가 서로를 속고 속이는 약육강식의 치열한 생존경쟁 속으로 스스로가 내던져졌음을 상징한다. 특히 그녀의 베를린 임무를 돕기 위해 나선 '퍼시벌(제임스 맥어보이)'과 그녀를 감시하기 위해 등장한 프랑스의 신참 요원 '델핀 라살(소피아 부텔라)' 사이에 형성되는 묘한 관계는 이 작품에서 가장 아슬아슬하면서도 흥미진진한 요소 가운데 하나다.



이 영화를 관람하며 문득 떠오르는 최근 작품을 꼽으라고 한다면 대충 두 개로 압축할 수 있을 것 같다. 미국 영화 '존 윅'과 한국 영화 '악녀'다. 한 사람의 미친 듯한 필살기 액션으로 주변 인물들을 초토화시키는 장면과 요소요소의 장치들은 '존 윅'과 가까이 맞닿아 있으나 '존 윅'의 키아누 리브스가 무한 총질 액션을 선보인 것과 달리 이 영화의 샤를리즈 테론은 대부분 맨몸이거나 도구를 사용한다는 점이 굳이 다르다면 다르다. 


영화 '악녀'에서 김옥빈은 관객이 그녀와 함께 호흡을 맞추는 일만으로도 숨이 가빠올 정도로 고군분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대중들로부터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었던 건 빈약한 스토리 때문으로 읽힌다. 샤를리즈 테론 역시 '아토믹 블론드'에서 온몸을 불사를 만큼 신기에 가까운 액션을 선보인다. 다만, '악녀'보다 이 작품이 조금은 더 좋은 평을 받을 수 있는 건 아마도 '악녀'의 발목을 끝까지 잡았던 스토리의 빈약함을 벗어나 나름의 탄탄한 서사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작품이 미국판 '악녀'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렇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감독  데이빗 레이치


* 이미지 출처 : 네이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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