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가슴 아프고 먹먹한 이야기 '택시운전사'

새 날 2017. 8. 4.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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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아내를 먼저 떠나 보내고 서울에서 딸과 단둘이 살고 있는 개인택시 운전사 만섭(송강호)은 몇개월째 집세가 밀려 집주인으로부터 늘 타박을 받고 있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러한 소시민이다. 그러던 어느날, 식당에서 식사 도중 한 외국인을 태우고 광주까지 갔다가 그날 다시 서울로 올라올 경우 10만 원을 받을 수 있다는 다른 택시 기사들의 대화를 엿들은 뒤 귀가 솔깃해진 만섭은 바로 현장으로 택시를 몰고가 해당 기사 대신 자신이 그 외국인을 태우고 광주로 향한다. 


푸른 눈의 외국인은 독일 방송사인 ARD 소속 기자였으며, 일본에서 특파원으로 근무하다가 한국에서 벌어진 소식을 듣고 이를 취재하기 위해 광주행을 택한 위르겐 힌츠페터(토마스 크레취만)였다. 만섭은 1980년 5월 당시 광주에서 벌어지던 참상을 자세히 알지 못한 채 하룻동안의 고생만으로 밀린 집세를 모두 갚을 수 있노라는, 나름의 치밀한 계산에 의해 움직였던 셈이다. 



하지만 광주로 진입하는 길은 험난함 그 자체였다. 진입로는 계엄군에 의해 모두 차단된 상태였고, 동네 주민들만 안다는 샛길 방향으로 우회해 보아도 이곳 역시 차단되어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두 사람은 힌츠페터가 외국인이라는 이점 아닌 이점을 적극 활용, 임기응변을 발휘, 마침내 광주 입성에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이내 후회하고 마는 만섭이다. 광주 시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이곳으로의 진입 과정보다 훨씬 급박하고 끔찍했기 때문이다.



1980년 5월 광주 그리고 5.18, 우리에게는 씻을 수 없는 비극적인 현대사다. 이 영화는 삼엄한 계엄 체제 하에서의 언론 통제를 뚫고, 유일하게 광주를 취재하여 전 세계에 5.18의 참상을 널리 알린 위르겐 힌츠페터. 그리고 당시 힌츠페터를 자신의 택시에 태운 채 광주에 들어갔다가 빠져나온 택시운전사 김사복 씨의 실재했던 사건을 토대로 제작된 작품이다. 



1980년 5월의 광주는 외로웠다. 외딴 섬이었다. 외부로부터의 진출입로가 모두 차단되고, 통신선마저 두절된 채 중무장한 계엄군에 의해 도시 전체가 완전히 포위된 상태였으며, 철저한 보도 통제가 이뤄지고 있었다. 덕분에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맞선 선량한 광주 시민들은 졸지에 폭도나 빨갱이로 내몰리던 터였다. 



당시 최고 히트곡 가운데 하나인 조용필의 '단발머리'를 택시 안에서 맛깔스럽게 따라부르던 만섭에게 있어 당장은 돈이 최고의 덕목이었다. 10만 원을 받아 하루빨리 밀린 집세를 갚는 일이 그에겐 지상과제였기 때문이다. 손님을 목적지까지 무사히 태워다 주면 만섭은 자신의 소임을 다한 셈이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계엄 상황의 살벌한 광주로 진입한 그는 손에 잡힐 듯한 위험 속에서도 카메라를 들고 취재를 감행하는 힌츠페터가 몹시 못마땅했다. 자신은 전혀 관심이 없으며 연루되고 싶지도 않은 작금의 위협으로부터 빨리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광주는 그의 생각만큼 호락호락한 상황이 못됐다. 힌츠페터는 계엄 당국이 요주의 인물로 점 찍은 상황이었으며, 그를 택시에 태우고 광주 시내를 돌아다니는 만섭 역시 이미 그들의 표적이 돼있었다. 영문도 모른 채 쫓겨다녀야 했던 만섭이 겪은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아프다. 서울에 홀로 두고 온 딸 아이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어떡하든 서울로 돌아가야 했다. 



힌츠페터 그리고 광주에서 만나 연을 맺게 된 이들을 과감히 뿌리치고 용케 광주를 벗어난 만섭이다. 광주 이외의 지역은 지극히 평화로웠다. 긴장이 풀리니 배가 고파왔다. 부근 식당에 들어간다. 그런데 식당에서 주인이 서비스로 그에게 내어준 주먹밥은 광주에서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게 아닌가. 만섭은 자신이 빨갱이가 아닌데 빨갱이라며 쫓겨다니면서 무차별 폭행을 당했던 사실이 너무도 억울했다. 두드려 맞은 자리가 몹시 아파왔다. 만섭은 서울로 가려던 택시를 급작스레 광주로 되돌리는데...



만섭과 인연을 맺은 광주시민 황태술(유해진)은 만섭과 같은 평범한 택시 운전사였으며, 재식(류준열)은 대학가요제에 출전하기 위해 대학에 진학했다며 너스레를 떠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그러한 앳된 청년이다. 이들처럼 평범하기 그지없는 이들이 계엄군에 의해 꼬꾸라지는 자신의 형제 자매 친구의 모습을 그저 넋놓고 바라볼 수만 없어 폭압에 저항하고 나섰던 게 바로 5.18이다. 언론이 통제된 상황에서 흘러나오는 보도는 온통 외부에서 폭도와 빨갱이가 광주로 잠입하여 벌어진 폭동이란다. 그러나 소시민 만섭의 시선으로 직접 접한 광주의 모습은 그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역시 송강호다. 그의 연기는 너무도 찰지고 코믹스러웠으며 맛깔스러웠다. 때로는 우스워 웃음이 절로 튀어나왔으며, 때로는 안쓰러워 함께 눈물을 흘려야 할 만큼 그의 연기는 출중했다. 여기에 같은 택시 기사로 출연한 유해진의 구수한 입담 및 연기가 더해지니 비로소 작품이 온전히 살아나는 느낌이다. 힌츠페터와 만섭 그리고 재식(류준열)에게는 저승사자 같았을 사복조 대장(최귀화)은 흡사 영화 터미네이터의 T-1000을 빼닮았다. 얼마나 공포스러웠을까.



영화는 역사적 중량감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가벼울 만큼 5.18 당시 광주를 비교적 차분히, 그리고 객관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우리 같은 소시민의 눈을 통해 현장에서 바라보게 된 5.18, 그리고 그들이 몸소 경험했던 당시의 참상에 대해 이 작품은 어떠한 종류의 가치판단도 배제한 채 우리의 비극적 현대사를 그저 묵묵히 스크린 위에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더욱 가슴 아프고 먹먹하다. 시종일관 눈과 귀를 떼게 할 수 없을 만큼 깨알 같은 재미가 있으며, 뭉클한 감동을 선사해주는 영화다.



감독  장훈


* 이미지 출처 : 네이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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