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전장 속을 함께 누비는 듯한 생생함 '덩케르크'

새 날 2017. 7. 21.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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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케르크에 남겨진 채 독일군에 의해 포위된 토미(핀 화이트헤드)는 필사의 탈출을 시도하지만, 적군의 공격에 의해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토미와 비슷한 운명에 처해진 병력은 무려 30만 명을 웃돈다. 이들을 모두 생환시키기엔 어느 모로 보나 무리수임이 틀림없다. 덕분에 생존 본능으로부터 발현된 듯한 보이지 않는 경쟁과 싸움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다. 시시때때로 퍼부어지는 적군의 포탄 세례는 방금까지 곁에서 함께 공기를 마시던 동료들의 목숨을 눈앞에서 앗아가곤 한다. 살아 있으되 살아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을 만큼 덩케르크에 남겨진 군인들의 목숨은 경각에 달해 있는 셈이다. 


영국 본토를 향하는 배에 어렵사리 올라선 채 이젠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노라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토스트 한 쪽과 따뜻한 차 한 잔을 받아 먹으면서 모처럼 달콤한 휴식을 취하려던 순간, 적군의 포탄은 여지없이 그들의 머리 위를 노린다. 포탄 세례가 퍼부어진 것이다. 일순간 혼비백산이 된 그들은 또 다시 바다 위로 내동댕이쳐지며, 본의 아니게 생존을 위한 치열한 전장 속으로 뛰어들어야만 한다. 하늘 위에서 감행된 적군의 공격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전투기가 하늘 위로 발진하는 순간 필사적으로 덩케르크를 탈출하기 위해 해변가에 모여 있던 병사들은 동시에 방어 자세를 취하며 일제히 침묵 속으로 빠져든다. 일부 병력은 소총으로 저항해 보지만, 역부족이다. 포탄이 자신의 주변에 떨어지지 않기 만을 고대할 뿐, 자신의 목숨을 운에 맡긴 채 하늘로부터의 공격에 이들이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이란 딱히 없었다.



이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에 파견된 영국군 22만여 명과 프랑스 등 연합군 11만여 명에 대해 프랑스 북부 해안으로부터 영국 본토로의 철수를 감행했던 작전인 이른바 '덩케르크 철수'를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영화는 크게 육지, 바다, 하늘 등 세 곳의 공간적 배경을 토대로 전개된다. 바다와 접해있는 해변가에서는 적군에 의해 포위된 채 시시각각 다가오는 위협 속에서 필사적인 탈출을 시도하던 피 말리는 일주일 간의 시간을 그리고 있다. 바다 위에서는 군인들의 탈출을 돕기 위해 민간 선박을 몰고 덩케르크를 향해 항해하는 하루 동안의 시간을, 아울러 하늘 위에서는 지상에 포탄을 투하하며 극도의 공포감을 심고 있는 적의 전투기를 격추시키기 위한 전투 비행단의 한 시간가량의 임무가 그려진다.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등 그동안 여타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독특하며 뛰어난 음향 효과 덕분에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가는 병사의 모습을 직접 그리지 않아도 전쟁의 참상과 공포가 극사실적으로 다가온다. 주로 시각적인 요소에 의존하기보다, 이는 최대한 절제한 상태에서 청각과의 절묘한 조화를 통해 독특한 공감각적 이미지를 그려내고 있다. 



사방이 갇힌 공간, 어디에서 날아들지 모르는 총탄은 극도의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고도 남는다. 날카로운 음향과 함께 점차 고조되어가는 분위기 속에서 지상으로 퍼부어지는 포탄은 우리의 청각을 강하게 자극하며 흡사 주인공과 함께 전장 속으로 뛰어든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주인공의 숨이 가빠지는 듯싶으면 어느덧 우리의 호흡마저도 함께 거칠어지는 느낌이다. 지축을 뒤흔드는 강력한 무기 세례와 많은 대사 없이 오로지 절제된 영상과 음향만으로도 전쟁의 참상을 이토록 강렬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건 정말로 놀라운 연출이다.



위기에 처한 병사들을 구출하기 위해 나선 어선, 요트 등 민간 선박들의 의로운 행위는 단연 덩케르크 탈출 작전의 수훈갑이다. 특히 영화속 도슨(마크 라이런스)의 대가 없이 벌이던 병사 구출 행위는 그 뒤에 가려진 수많은 이들의 비슷하거나 혹은 더욱 뛰어난 의로움을 적극적으로 대변하는 듯싶다. 적군의 공중 폭격은 덩케르크에 남아 있던 병사들에게는 가장 큰 공포의 대상이다. 이를 격추시키기 위해 단 한 시간가량의 비행만 가능한 분량의 연료를 싣고 하늘 위에서 벌인 파리어(톰 하디) 등의 전투 비행단의 공격 본능 또한 이번 구출 작전의 수훈갑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사명은 병사들을 안전하게 구출하는 것이라며 이번 작전을 성공리에 마친 지도자의 리더십도 귀감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없다. 바다와 하늘 그리고 육지 위에서 입체적으로 펼쳐진 이들의 노고와 희생 덕분에 덩케르크에 고립됐던 30만 명의 병사들은 멋진 환호성을 내지를 수 있었을 테다. 



전쟁으로 인한 상흔은 이번 작품 속에서도 여러 갈래를 통해 드러난다. 적의 공격으로 격추된 전투기 조종사는 당시의 충격으로 인해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로 도슨에 의해 구조된다. 그의 행동은 불안하기 짝이없다. 전쟁으로 인한 상처를 영원히 지우지 못하고 평생 그와 관련한 트라우마에 시달린 채 살아가야 할 운명과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생존 본능이 그 어떠한 가치보다 우위에 서있는 특이한 상황 하에서 빚어지는 폭력은 그 광기 때문에라도 더욱 두렵다. 특히 전쟁터에서는 유독 그렇다. 남들과 조금 다르거나 무언가 부족할 경우 집단 광기 앞에서 그들은 흔히 희생양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전쟁이 그려내는 참상 가운데에서도 이는 가장 끔찍한 모습이라 할 만하다. 토미와 함께 목숨을 건 탈출을 시도하면서 알게 모르게 끈끈한 전우애를 형성했던 깁슨(아뉴린 바나드)을 향한 동료들의 폭력은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전쟁의 참상을 이보다 더 극적으로 묘사할 수 있을까? 절제된 영상과 그에 반해 훨씬 날카롭게 다가오던 음향 효과는 2시간 가까이 되는 러닝타임 내내 주인공들과 함께 전장 속에서 숨을 헐떡이며 누비다 온 느낌을 주고도 남는다. 구조된 병사들이 기차 안에서 영국 본토로의 접근과 동시에 평화롭게 일상을 즐기던 시민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안도의 숨을 내쉬거나 시민들이 건네준 맥주를 받아든 채 이를 마시는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비로소 그들처럼 나 또한 평화로운 일상 속으로 다시 살아 돌아온 느낌이 들어 정신이 번쩍 든다.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 이미지 출처 : 네이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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