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열혈 항일운동가의 불꽃 같은 삶 '박열'

새 날 2017. 7. 13.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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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일본에서 인력거꾼과 인삼 행상 활동을 통해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던 박열(이제훈)은 '불령사'라는 항일운동 조직체를 운영하는 조선의 열혈청년이다. 한편 작은 오뎅 가게에서 일하던 가네코 후미코(최희서)라는 일본 여성은 박열이 창작한 시 '개새끼'를 우연히 조선잡지에서 접한 뒤 그를 흠모하게 되었고, 그의 철학과 사상에 동질감을 느낀 뒤로는 항일운동을 함께 펼치면서 동거를 결심한다. 조선의 불령선인 박열과 불우한 일본 처자 가네코 후미코의 인연은 이렇게 맞닿는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도쿄와 그 인근에 진도 7.9의 대지진이 엄습해온다. 이로 인해 10만 명 이상의 시민이 목숨을 잃는다. 이른바 간토 대지진이다. 민중들의 움직임은 심상찮았다. 민심이 흉흉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 내각은 이를 사전에 차단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타고,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를 일제히 퍼뜨린다. 이러한 소식이 알려지자 일본 전역에서 조선인을 향한 무차별 살육이 자행된다. 무고한 조선인 6천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참상은 이렇게 시작됐다. 



국제사회로부터의 비난이 두려웠던 일본은 무언가 시선을 돌릴 만한 사건이 필요했다. 그러던 중 항일운동단체인 '불령사' 를 조직한 박열이 폭탄을 이용해 일본 국왕을 암살하려 한다는 첩보를 입수, 간토대학살 당시 경찰에 의해 붙들려 온 그를 대역죄인으로 몰아가려는 치밀한 음모가 계획된다. 일본의 계략을 눈치 챈 박열은 오히려 이번 기회를 통해 조선인을 향한 일본의 끔찍한 만행에 대해 국제사회의 시선이 집중될 수 있도록 스스로 일본 국왕의 암살 계획을 자백하는데...


영화의 오프닝과 클로징을 동시에 장식하던 노래 한 곡이 유독 귀를 사로잡는다. '동양의 무희'라는 이름으로 세계적인 찬사를 얻었던 무용가 최승희가 직접 부른 '이태리의 정원'이라는 곡이다. 1936년에 발표된 해당 노래 속 가냘픈 그녀의 목소리는 구슬픈 듯하면서도 결코 어둡지만은 않은 특징을 갖고 있다. 극의 시대적 상황과 해당 곡의 심상은 어딘가 모르게 찰떡궁합이다. 덕분에 작품의 분위기는 더욱 고조된다.



박열은 이념에 따른 철권통치, 일제의 천왕체제, 민족주의, 식민주의 따위를 모두 거부하고, 지배 피지배 관계의 굴종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얻고자 하는 아나키즘에 심취해 있는 인물이다. 그와 연을 맺은 일본 여성 가네코 후미코 역시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뒤 조선 땅에 들어가 갖은 고초를 겪으며 제국주의 일본의 모순과 천황이라 불리는 일본 국왕체제에 반감을 갖게 된다. 



오뎅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면서 평소 조선의 유학생 그리고 불령사 멤버들과 가까이 지내온 데다가, '개새끼'라는 박열의 자작 시, 아울러 진정한 자유주의자라는 두 사람만의 사상적 공감대는 이들의 관계를 더욱 끈끈하게 이어주는 매개 역할을 톡톡히 하고도 남는다.



박열과 이념적으로 뜻을 함께하는 조선인들, 그러니까 '불령사'에 소속된 이른바 불령선인들은 정기적으로 회합을 갖고 일본 아나키스트의 강연을 듣거나 사회주의를 매도한 조선 기자를 찾아가 폭행하는 등 반일 활동을 주도한다. 간토대학살 당시 경찰에 모두 투옥된 처지 속에서도 이들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옥중 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깊게 맺은 인연의 끈을 절대로 놓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식지 않는 열정과 지난한 투쟁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우리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박열의 기개는 놀라웠다. 조선인을 향한 자경단의 위해와 일본 경찰의 서슬 퍼런 위협도 그의 결연한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일본 역사상 최초의 대역죄인이 되어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으로 내몰린 상황에서도 일본의 법정에 서서 오히려 일본 국왕과 일본 정부의 잘못을 논리적으로 또박또박 지적하는 그였다. 그는 일개인이 아닌, 스스로가 조선이 되어 일본 국왕과 정부를 상대로 근엄하게 꾸짖는다. 


물론 그의 이러한 꼿꼿한 자세는 어느 누구보다 굴종적인 삶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추구하는 사상적 강인함이 바탕을 이루고 있는 탓이 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평생 동지이자 배필인 가네코 후미코의 육신을 초월하는 끈끈한 동지애가 없었다면 애초부터 불가능한 결과였을 테다.



주연 배우인 박열의 이제훈과 가네코 후미코의 최희서가 펼친 열연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간토대학살을 계획한 일본 대신 미즈노(김인우)를 비롯한 다양한 조연 배우들의 감초 연기가 절묘하고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덕분에 박열의 삶이 더욱 멋지고 빛나는 작품으로 탄생한 게 아닐까 싶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한 건물, 의상, 소품들 역시 작품의 격조를 한 차원 높이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재판장,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맘대로 죽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 


항일투쟁에 온몸을 바치며 불꽃 같이 살다간 그의 생애에 절로 머리가 숙여지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무척 부끄러운 노릇이지만 그동안 잘 알 수 없었던 한 항일 운동가의 삶을 이토록 멋지고 훌륭한 작품으로 만날 수 있게 해준 감독에게도 박수를 보낸다. 자유를 향한 불굴의 의지와 열정, 그리고 따뜻한 그의 조국애를 느껴보자.



감독  이준익


* 이미지 출처 : 네이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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