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블라인드 채용 확대, 학벌사회 변화 올까?

새 날 2017. 7. 7.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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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준비생들 사이에선 '식스펙'이라는 용어가 심심찮게 회자되곤 한다. 여기서의 '식스펙'이란, 흔히 운동 욕구를 자극하는 멋진 모양의 복근을 나타내는 그 '식스팩'이 아니다. 학벌, 학점, 외국어점수, 인턴, 공모전 수상, 어학연수 등 여섯 가지의 스펙을 갖추지 못하면 결국 패배자가 되거나 낙오자가 되고 만다는, 취업준비생들에겐 너무도 간절하고 치열한 의미로 다가오는 용어다. 그밖에 스펙쌓기에 전념하는 취업준비생들을 일컫는 신조어도 있다. 바로 ‘호모 스펙타쿠스(SPECtacus)’라는 단어다. 


이렇듯 많은 취업준비생들이 지금 이 시각에도 맹목적으로 스펙쌓기에 몰두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스펙이 앞으로 그들이 담당하게 될 직무와는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은 매우 가슴 아픈 현실이다. 이로 인한 시간적 금전적 비용은 가히 천문학적이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에 따르면 대졸자들이 스펙을 쌓기 위해 들인 비용은 평균적으로 1인당 4269만 원에 이른다. 아울러 대다수 취업준비생들이 한 번쯤 목표로 삼곤 하는 이른바 대기업에 취업하지 못해 발생하는 사회적 기회비용은 연간 2500억 원을 웃도는 것으로 조사됐다. 



좁디 좁은 채용의 관문을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의 숫자는 극히 한정되어 있고, 이를 준비하는 이들은 넘쳐나는 절대적 비대칭 상황, 이는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인 모순이다. 이의 극복을 위해 정부가 공공기관과 지방공기업 등 공공부문에 블라인드 채용을 전면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과도한 스펙 쌓기에 의한 사회 경제적 비용을 줄이고, 궁극적으로는 학벌 및 스펙 위주의 사회로부터 탈피, 서서히 능력 중심 사회로의 변화를 꾀하겠노라는 미래 청사진의 일환이다. 


물론 이는 전혀 새로운 정책이라고 볼 수 없다. 상당수의 공공기관들이 이미 국가직무능력표준(NCS) 기반 채용 제도를 현업에서 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NCS 기반 채용이란 학벌 등 불필요한 스펙(Over-spec)이 아니라 직무 수행 현장에서 원하는 직업능력, 즉 해당 직무에 맞는 스펙(On-spec)을 지원자가 갖추었는지를 평가하는 채용 방식을 말한다. 블라인드 채용의 확대는 이러한 기존 NCS 기반 채용 제도의 취지를 본격 확산시키겠노라는 의지로 풀이된다. 정부는 이를 우선 공공부문부터 전면 확대하고, 경과를 지켜보면서 민간 기업에도 점차 적용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고용노동부가 이번에 공개한 예시 입사지원서에 따르면, ‘인적사항’ 란에는 성명, 주소, 연락처, 이메일 등 최소한의 사항만 기재하게 돼있으며, 키, 몸무게 등 신체조건이나 출신지, 가족관계 등을 적는 칸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학력 또한 마찬가지다. 출신학교, 전공, 학위, 학점 등을 기재하지 않아도 된다. 반면, 직무 중심 채용의 유도와 확산을 위해 직무 관련 교육과 자격사항 그리고 경험 또는 경력사항 등에 대해선 상세히 적도록 했다. 철저하게 직무 적합성만을 따지겠노라는 의지로 풀이된다. 면접 역시 직무 중심으로 이뤄진다. 직무 수행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 등을 사전에 공지, 응시생들이 이를 준비할 수 있도록 하고, 직무 관련 능력을 파악하는 방향으로 설계된다.


그렇다면 정부의 이러한 정책을 통해 과연 지독한 학벌 및 스펙사회의 근본 틀을 능력 중심 사회로 변모시키는 일이 가능할까? 직장인이나 취업준비생 등 대중들의 반응은 크게 둘로 엇갈린다. 좋은 대학을 나와야 좋은 회사를 갈 수 있다는, 우리 사회 기저에 깔려있는 보편적인 인식, 그리고 견고한 학벌 중심 풍토가 이러한 채용 방식을 통해 어느 정도는 무너지게 될 것이라는 희망 섞인 의견이 있는 반면, 학벌은 자신이 노력하여 얻은 대가이자 학창 시절을 어느 누구보다 성실하게 보냈다는 객관적인 증거이기에 이를 기재하지 못하게 하는 건 역차별이라는 부정적인 의견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기업체의 인사 담당자들은 10명 가운데 8명이 블라인드 채용 제도 도입에 찬성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 취업포털 사이트의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민간기업 인사 담당자 가운데 82.5%는 블라인드 채용 취지에 공감하고 있으며, 80.9%는 자신의 회사에 도입되는 것을 적극 찬성한다고 답했다. 블라인드 채용 도입에 찬성하는 이유로는 ‘스펙을 보고 뽑은 지원자들이 별다를 바 없다’는 응답이 가장 많았고, 그밖에 ‘기존 이력서 항목에 문제점이 많다’, ‘스펙초월, 공정채용 등에 공감한다’, ‘선입견과 차별적 판단 요소를 배제할 수 있다’ 등을 꼽고 있다.



이렇듯 기업체의 인사 담당자들조차 블라인드 채용 제도의 취지에 공감하고 있다는 건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정책의 방향성이 크게 어긋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다만 해당 제도가 제대로 자리를 잡고, 오버 스펙이 아닌 온 스펙, 아울러 우리 사회가 진정 능력 중심 사회로 좀 더 다가가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를 충족시켜야 한다. 이러한 제도 하에서는 자신의 직무 역량을 어필할 유일한 요소가 될 자기소개서와 면접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다. 


이 두 가지 요소를 통해 기업이 과연 어떤 방식으로 직무에 적합한 인재를 온전히 가려낼 것인가는 해당 제도의 안착 및 능력 중심 사회로의 이전에 대한 성공 여부의 가늠자 역할을 톡톡히 할 듯싶다. 지금도 이른바 자소설이라 불릴 만큼 자기소개서의 과장된 표현이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현상이 더욱 심해지거나 면접의 중요성이 재차 부각됨과 동시에 블라인드 채용에 맞춘 또 다른 스펙이 만들어지는 등 벌써부터 해당 제도의 실효성에 대해 의구심을 보내는 눈길이 적지 않다. 이를 불식시켜야 하는 과정이 앞으로 남은 숙제이자 블라인드 채용 제도의 안착을 위한 전제 조건이다. 


물론 사회 구성원의 의식이 전환되거나 일정한 틀의 패러다임이 변모하는 과도기적 상황에서 그와 같은 우려는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아울러 해당 제도가 제대로 정착되기 위해선 일정 시간이 요구되고 다양한 시행착오를 겪게 되리란 건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다. 어쨌든 공공부문의 블라인드 채용 제도가 우리 사회의 오랜 병폐 가운데 하나인 학벌주의를 일소시키고, 직무 중심, 능력 중심 사회로 변모케 하는 다양한 기회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면 이의 안착과 성공을 바라지 말아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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