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이력서 사진 부착 금지, 정착돼야 하는 이유

새 날 2017. 2. 11.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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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취업 빙하기'라는 용어가 근래 심심찮게 들려온다. 왜 아닐까 싶다. 저성장 기조에 깊숙이 빠져든 한국 경제가 국정농단사태라는 초유의 정치적 혼란기를 겪으며 어느 방향으로 선회해야 할지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는 형국이다. 덕분에 N포세대라 불리는 청년 계층의 취업난은 배가되고 있다. 가뜩이나 바늘구멍 같은 취업 관문 앞에서 명확한 평가기준에 따른 공정한 채용 기회마저 보장되지 않는 터라 청년들의 상대적 박탈감은 더욱 부풀려지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취업 사이트 '사람인'이 구직자를 대상으로 채용의 불공정성에 대해 물었더니, 실제 구직자 10명 중 8명가량이 채용 방식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답변했단다. 채용 과정은 보통 여러 단계를 거치는데, 그 중에서도 첫 관문은 이력서 등 지원 서류로부터 이뤄지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불공정은 채용의 첫 단추인 이력서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직무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개인정보를 요구하는 기업들이 여전히 부지기수다. 본적지에 출신학교며 신체조건, 심지어 가족의 소득과 직업 등을 기재해야 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연합뉴스


특히 이력서의 사진은 취업준비생의 첫인상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소인 데다가, 이 때문에 직무능력이 아닌 외모 등 외적인 요소로 평가가 이뤄질 개연성을 크게 높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극심한 취업난 속에서 ‘삼성형 얼굴’이 있다는 등의 어이없는 속설이 시중에 떠돌다 보니 외모와 관련한 고민은 어느덧 여성의 전유물이 아닌 모든 취준생의 것이 돼버렸다. 아마도 우리나라가 성형대국이라는 지위에 올라서게 된 데엔 이렇듯 외모로 사람의 능력을 평가하는 기업 문화가 한 몫 단단히 거들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다. 


실제로 지난 2014년 한 취업 사이트가 대학생을 상대로 설문조사한 결과, 10명 중 3명가량이 취업 성형을 고려한다고 답한 바 있다. 가뜩이나 다양한 종류와 영역에서의 스펙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외모는 취업이 당장 절실한 구직자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스펙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취업 사이트의 조사에 따르면 여성 구직자의 외모관리 비용에 평균 121만 원이 소요된다고 한다. 이쯤되면 개인의 부담도 부담이지만 범국가적인 낭비 요소가 아닐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러한 폐해를 줄이려는 노력이 사회 일각에서 시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입사지원서에 사진 부착과 신체조건을 금지하는 ‘채용절차 공정화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발의되어 지난해 11월 28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를 통과했다. 회사가 구직자에게 사진, 외모, 키, 체중, 출신 지역 등 직무수행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정보를 요구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 법안의 취지는 기업에서 인재를 선발할 때 불필요한 구직자의 정보를 보호하고, 채용 과정의 공정성을 높이고자 하는 데 있다. 



물론 한국경영자총협회 등 기업 측이 이에 반발하고 나선 터라 법안의 통과를 섣불리 장담할 수는 없다. “사진이 없으면 신원 확인이 어려워 채용과정이 복잡해지고 공정한 채용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며 이에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기업이 기초 심사자료에 사진 부착을 요구하는 것은 많은 인원이 동시에 지원하는 공개채용 과정에서 신원을 정확히 확인하여 대리시험을 방지하는 등 공정하고 투명한 채용을 진행하기 위한 절차라는 점을 그 이유로 들고 있다. 


그러나 얼마 전 한 기업체에서 시도한 개정 법안과 비슷한 방식의 채용 사례는, 현재 기업들이 반대의 근거로 들고 있는 채용 과정에서 소요될 법한 유형무형의 비용에 비해 사회 전체가 얻을 수 있는 실익이 훨씬 크게 다가온다는 점에서 관심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SK텔레콤이 지난 2015년 신입사원 채용 서류 전형과 면접 당시 지원자의 이름, 성별, 전공, 대학졸업 여부와 자기소개서만으로 평가하고, 나머지 사진과 가족 관계, 집 주소, 출신 대학 등 능력과 관련 없는 항목을 지원서에서 완전히 배제하는 블라인드 방식으로 진행하여 100명의 신입사원을 채용한 바 있다. 그 결과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이른바 'SKY대' 출신 합격자가 줄어든 반면, 지방대 출신이 크게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SK텔레콤은 주요 대기업 가운데서도 SKY 출신 비중이 유독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번 공채 결과 SKY 출신 합격자가 30% 미만이었고, 수도권과 지방대 출신이 50%에 육박했다고 한다. SKY 출신의 비중이 50% 이상이었던 과거를 감안한다면 상당히 유의미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궁금해지는 건 이렇듯 공정한 방식으로 채용된 인력이 과거에 입사한 인력과 비교하여 실제로 직무능력에 있어 어떠한 차이를 보였는가 하는 점이다.


ⓒ헤럴드경제


어떤 이들에게 있어 이력서에 사진을 부착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란 굉장히 사소한 사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작은 변화가 산업 전반에 뿌리 내려질 경우 비로소 외모와 스펙 중심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음은 물론 우리의 오랜 악습인 학벌중심사회가 조금씩 변모하기 시작, 결국 능력중심사회로 이동하게 되는 단초로 작용할 수 있을 테다. 다행히 차기 대통령선거의 유력 주자로 떠오르고 있는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스펙 없는 이력서 정책 추진을 약속했다. ‘블라인드 채용’을 의무화하면 학력 차별과 지역 차별을 크게 줄일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대환영이다.


기업들은 관성에 몸을 맡긴 듯 과거의 문화에 젖어 여전히 그로부터 빠져나오기 싫어하는 눈치임이 역력하다. 하지만 사회의 오랜 악습이자 과거의 유물이기도 한 스펙과 외모 위주의 채용 문화에 길들여진 채 이에 안주하려 하기보다 직무 중심 형태의 채용으로 기업 문화를 바꿔나가야 함이 옳지 않을까? 스펙과 외모 등 외적인 요소가 아닌, 직무 역량 중심의 공정한 채용 문화 정착이야말로 궁극적으로는 만병의 근원인 학벌중심사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단초임이 틀림없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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