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저냥

낭만과 시간이 빚어낸 뭉클함

새 날 2017. 1. 26. 12:07
반응형

우리는 소설이나 영화 등의 허구를 통해 바다에 띄워보낸 편지가 해류를 타고 수 년만에 다른 대륙에 도착하여 특정 사건의 실마리를 제공하게 된다는 내용을 간혹 접합니다. 물론 이는 통상 서사의 큰 줄기로 작용하거나 아니면 사건의 변곡점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아 다른 경우보다 더욱 극적으로 받아들여지곤 하는데요. 그래서 이를 흉내낸다며 장난삼아 바다나 강물에 자신의 흔적을 띄워보냈던 기억이 제게도 적잖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처럼 순전히 장난삼아 바다에 띄워보낸 편지가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 주인의 품으로 다시 돌아온 사연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의 이야기인데요. 1983년 당시 해군이었던 헙스트 씨는 미 해군 항공모함을 타고 대서양을 항해하던 도중 그냥 재미삼아 유리병 편지를 바다에 던지게 됩니다. 물론 장난이었기에 편지에 특별히 이슈가 될 만한 메시지는 없었습니다. 자신의 이름과 함께 'CV-43호에서 보내는 편지. 지금은 대서양을 항해하는 중'이라는 짧은 메시지만을 남긴 것입니다.


ⓒSBS


순전히 장난삼아 해본 일이었기에 바다에 띄운 해당 편지는 곧 그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날 34년 전 띄워 보낸 유리병 편지를 자신들이 가지고 있다는 믿기 힘든 메시지를 누군가로부터 전달 받게 됩니다. 그의 SNS 계정을 통해서였습니다. 유리병을 주운 이들은 어떤 부부였는데, 헙스트 씨가 편지를 바다에 띄워보낸 지 1년이 지난 해에 스쿠버다이빙을 하다가 이를 우연히 발견했다고 합니다. 여기까지는 사실상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긴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숙성되어야 사연의 감동도 더욱 커지기 마련입니다.


편지를 주운 부부는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합니다. 헙스트 씨를 찾아 바로 돌려줄까도 생각했으나 시간이 흐른 뒤에 연락해보는 것이 훨씬 낭만적일 것이라는 나름의 판단 끝에 유리병을 그냥 집에 보관해두기로 마음먹은 것입니다. 세월은 참 빨리도 흘러갑니다. 헙스트 씨나 그의 편지를 주운 부부도 이를 피해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 사이 이들 부부조차도 헙스트 씨의 편지를 까맣게 잊게 됩니다. 극적으로 다시 편지를 발견하게 된 건 이사를 위해 이삿짐을 챙기던 도중이었습니다. 부부는 결국 헙스트 씨를 수소문하였고, 그 결과 오늘날의 뭉클한 감동을 빚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부부가 헙스트 씨의 편지를 바다에 띄워보낸 지 1년만에 발견하여 바로 돌려주었다면 어땠을까요? 이 역시 놀랍기는 했겠지만 과연 오늘날과 같은 감동을 이끌어낼 수 있었을까요? 마찬가지로 시간이 흐른 뒤 돌려주는 일이 낭만적일 것이라며 이 편지를 보관하긴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그냥 지나는 세월 앞에 무기력해지며 잊혀졌거나 발견되지 못해 영원히 묻혀졌다면 헙스트 씨의 34년 전 장난은 말그대로 장난 그 자체로 끝나고 말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이러한 사연이 우리에게 작은 감동을 전달할 수 있게 된 배경엔 부부가 간직한 애틋한 낭만과 이를 잊지 않고 끝내 당사자에게 돌려준 그들의 정성, 아울러 무려 34년이란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의 흐름이 그 안에 고스란히 녹아들어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지만 일견 비슷한 측면이 읽히는 최근 개봉한 영화 '더 킹'을 떠올리게 합니다. 검찰 전략부 내에는 오로지 시간이라는 레시피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주요 이슈들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를 김치처럼 숙성시키다가 중요한 순간에 꺼내들어 국면 전환용으로 활용하는 장면이 영화 속에 등장합니다. 시간은 이렇듯 무기가 되기도 하며 때로는 감동을 선사해주기도 하는, 아주 요술 같은 존재입니다.


33년 전 부부가 스쿠버다이빙을 하며 간직했던 멋진 낭만은 세월이 흐르면서 더욱 맛깔스럽게 익어갔고, 여기에 정성과 시간이라는 레시피가 곁들여지면서 헙스트 씨는 물론이거니와 우리 모두에게 뭉클한 감동을 전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헙스트 씨는 이 유리병 편지를 해군 박물관에 기증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더 많은 이들에게 이 놀라운 사연이 회자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