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현대사를 관통하는 한 편의 우화 '더 킹'

새 날 2017. 1. 19.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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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양아치 기질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박태수(조인성)는 요즘말로 표현하자면 소위 '일진'이다. 그의 주먹은 적어도 학교 내에선 최고다. 체육부 아이들마저도 그에겐 두 손 두 발을 모두 들 정도다. 그렇게 교련복을 입고 모자를 삐딱하게 눌러쓴 채 껄렁하게 다니며 동네 양아치들과 일전을 벌여 승리하는 일이 당시엔 최고의 힘을 가진 것이라 생각했던 박태수다. 그러던 어느날, 그의 아버지가 검사 앞에서 쩔쩔 매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목격한 박태수는 진짜 힘은 주먹이 아닌 권력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180도 돌변한 박태수는 자신도 반드시 검사가 되겠다며 특이한 방식으로 공부에 매진,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하게 되고, 군대를 다녀와서는 사법고시마저 패스한다. 박태수의 시골마을은 한바탕 축제 분위기에 휩싸인다. 우여곡절 끝에 검찰에 발을 들여놓은 박태수는 이상과는 달리 잡다한 사건에 매달리며 일반 회사원들처럼 일에 치인 채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그럼에도 그는 정의감만큼은 투철한 열혈 검사였다. 이런 그에게 어느날 특정 사건을 무마할 목적으로 선배인 양동철(배성우) 검사가 접근, 은밀한 제안을 해오는데...



박태수는 대한민국 사회를 쥐락펴락할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먹이사슬의 포식자이자 권력의 설계자이기도 한 부장검사 한강식(정우성) 라인에 합류, 승승장구한다. 자존심은 잠깐에 불과하며 세상을 크고 넓게 봐야 한다는 선배의 회유와 어렸을 적부터 폼나게 살고자 했던 그의 욕망이 일치하는 지점을 마침내 찾은 셈이다. 



건물 꼭대기 층에 위치한 펜트하우스는 현재 한강식 라인이 누리고 있는 권력이 정점에 달해 있음을 상징적으로 비유한다. 이곳에서는 소위 잘 나가는 검사들뿐 아니라 젊은 여성들과 온갖 술, 그리고 권력에 줄을 대려는 이들이 한데 뒤섞여 밤새 술판과 춤판이 벌어지곤 한다. 일반인들은 접근할 수 없을 뿐더러 절대로 알 수조차 없는, 그들만의 은밀한 세상이 다름아닌 이곳 펜트하우스이자, 권력을 지향하는 이들과 그들에게 빌붙어 먹고 사는 이들이 동시에 욕망을 쏟아내는 공간이기도 하다. 



상식과 도리 아울러 그나마 일말의 양심을 지녔던 박태수였으나, 펜트하우스라는 최고 권력의 상징과도 같은 은밀하기 짝이없는 저들만의 공간에서 자신이 곧 역사라 일컫는 한강식이라는 최강 권력의 기세 앞에 와르르 무너지며 그는 어느새 무장해제되고 만다. 이후로 박태수는 한강식의 충견이 되어 권력의 단맛에 흠뻑 취한 채 '더 킹'을 꿈꾸기 시작한다.



펜트하우스는 지난해 개봉한 영화 '하이-라이즈'에 등장했던 그것과 맞닿아있다. '하이-라이즈'에서의 펜트하우스는 경제적 부를 움켜쥔 소수의 최상위 계층을 상징한다. '더 킹'에서도 권력과 조폭이 유착을 통해 공생하며 돈을 끌어모으고 있듯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힘은 결국 돈과 권력으로부터 만들어지는 속성이기에 결국 두 작품은 그러한 측면에서 상당 지점이 닮아있다. 


'하이-라이즈'에서는 부를 움켜쥔 자들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권력 지향형 군상들의 민낯이 아주 적나라하게 풍자되고 있다는 점이 서로 다른 점이자 닮은 점이기도 하다.  



이 작품엔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의 역동적인 한국 현대사가 관통하고 있다. 전두환부터 이명박 전 대통령까지 실존했던 최고 권력자들이 순차적으로 등장한다. 한강식 라인은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권력의 입맛에 맞도록 이슈를 기획하며 충견임을 자처해 왔다. 불리한 이슈가 터질 때마다 사전에 준비해 놓은 사건 중 이를 무마시킬 만한 파괴력이 있는 이슈를 골라 물타기를 시도한다. 



몇몇 장면은 최근의 사회 실태를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이를테면 정권이 교체되는 시기, 즉 대통령 선거가 돌아올 때마다 어느 권력자에게 줄을 서야 할지 이를 알아보기 위해 점과 굿판에 의지하는 어이없는 모습은 누군가의 사이비 종교를 떠오르게 하며, 고 노무현 대통령이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검찰청에 들어설 때 건물 창가에 서서 비열하게 웃던 저들의 모습은 실재했던 당시의 누군가를 떠올리게 한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건 변화무쌍한 현대사의 흐름 위에 위트와 풍자를 얹은 독특한 연출 기법이 시도됐다는 점이다. 그냥 단순한 드라마 방식의 흐름보다는 확실히 감각 있는 연출이라 할 만하다.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대목이다. 위트와 풍자적인 측면에서만 보자면, 앞서 언급했던 시사 풍자극의 대명사격인 '하이-라이즈'와 비견될 만한 영화다. 



정우성의 슈트 차림은 같은 남자가 봐도 너무나 매력적으로 다가오며, 배성우의 연기엔 물이 오른 느낌이다. 조인성과 김아중은 스크린에서는 간만에 보는 것 같아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다행히 두 사람의 연기는 녹슬지 않은 듯싶다. 박태수의 절친이자 조폭 최두일로 분한 류준열은 시종일관 묵직한 연기를 선보이며, 그와의 끈끈한 우정을 과시한다.



이 작품에서는 그동안 세간에 알려진 검찰의 좋지 않은 이미지가 총망라된다. 이른바 정치검사, 스폰서검사, 떡검, 성검 등 권력의 정점에서 누렸던 그들의 민낯이 적나라하면서도 위트 있게 풍자된다. 


깔끔하고 말쑥하게 잘 차려입은 수트 밑에 감춰진 권력의 비열한 속성을 이 작품은 과거 한국영화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연출 기법을 통해 세련되게 까발린다. 덕분에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깨알 같은 재미는 덤이며, 때로는 풍자라고 하기엔 너무도 가슴 아픈 우리의 현실과 맞닿아 있어 불편함이 와닿기도 한다. 현대사를 관통하는 한 편의 우화라 할 만하다.



감독  한재림


* 이미지 출처 : 네이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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