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아비규환 속에서 엿보는 작은 희망 '판도라'

새 날 2016. 12. 8.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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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동남권 지역에 진도 6.1의 강진이 찾아온다. 사상 초유의 지진 앞에서 시민들은 혼비백산하게 되고, 건물과 도로는 온통 아수라장으로 변모하고 만다.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지진은 해변에 위치한 한별원자력발전소에 심각한 물리적 타격을 가한다. 원자로의 냉각장치에 이상이 생겨 작동이 정지되고 내부의 열이 급상승하기 시작한 것이다. 급기야 원자로의 노심에 위치한 핵연료가 과열되고 원자로의 노심마저 녹아내리는 이른바 '멜트다운'이라 불리는 심각한 지경에 직면하게 된다.


한별원자력발전소 부근에 위치한 월촌리 주민 재혁(김남길)은 발전소에 몸담고 있는 직원이다. 지진 당시 발전소 내에 있던 그와 동료들은 지진의 충격과 함께 무너져내린 건물 잔해에 묻혔으나 극적으로 부상을 피할 수 있었던 재혁 등의 사력을 다한 구조 활동 덕분에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 이들 대부분은 생명을 구하게 된다. 



한편 월촌리 마을엔 소개령이 내려지고 전세버스를 이용, 주민들을 인근 체육관으로 모두 이동시킨다. 하지만 멜트다운이 진행되고 있고, 원전의 폭발 위협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정부의 철저한 여론 통제로 인해 주민들은 세세한 영문을 모른 채 당국의 지시만 따르는 입장이다. 지진 여파로 쑥대밭이 된 발전소에는 소방구조대가 대거 출동, 방사능 노출의 위험을 무릅써가면서 원자로의 열을 식히기 위해 모진 고초를 겪는다. 그러나 허망하게도 결국 원자로는 엄청난 굉음과 함께 잔해를 주변에 흩뿌리며 폭발하고 마는데...



원자력발전소는 꿈이자 이상인가 아니면 재앙인가. 

마을에 들어선 원자력발전소는 주민들을 먹고 살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인가 아니면 마을을 황폐화시키는 요물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적어도 재혁만큼은 모두 후자를 택할 정도로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는 원자력발전소에서 일하면서 그 덕분에 경제력을 유지하고 있지만, 가슴 깊숙이 선원수첩을 몰래 지닌 채 원양어선을 타고 멀리 바다로 나갈 꿈을 그리며 지금 당장이라도 이곳을 뜨고 싶어한다. 다만, 그의 어머니(김영애)와 여자친구(김주현)의 만류가 늘 그의 발목을 잡고 있는 처지이다.



재혁의 밥벌이가 되고 있는 이곳 발전소는 일찌감치 그의 아버지와 형을 제물로 삼은 바 있다. 그들은 과거 발전소 내 사고로 방사능에 피폭된 채 끔찍한 고통을 겪으며 숨져갔다. 같은 경험을 두 차례나 겪어야 했던 재혁에겐 원자력발전소는 꿈의 직장도, 아울러 밥벌이라고 하여 고마운 존재도 아닌, 흡사 지옥과도 같은 곳이다. 하지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알 수 없어도 그의 눈앞에 또 다시 생지옥과 같은 현실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방사능 노출의 위험 속에서도 자신을 희생시키며 고군분투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의 모습과 그와는 반대로 극도의 비상 시국에서조차 경제적인 이득과 사사로운 이권에 사로잡힌 채 국민들에게 작금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알리려 하기보다 축소 은폐에 급급하고, 심지어 숫자놀음을 통해 일부 국민을 희생양 삼으려는 정부와 이른바 원피아라 불리는 부패한 집단의 모습을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남편과 자식을 불의의 사고로 잃었음에도 여전히 정부와 발전소의 논리를 굳건하게 믿고 있던 재혁의 어머니, 그리고 그와는 달리 원전과 관련하여 다소 비판적인 시각을 지닌 며느리(문정희)의 갈등과 이의 봉합은, 재난 컨트롤 타워인 젊은 대통령(김명민)과 노련한 총리(이경영) 사이의 미묘한 관계 그리고 추후 전개되는 이의 변화와 동일한 맥락으로, 서로 가까이 맞닿아 있다.



원전사고는 폭발 자체보다 그 이후 눈에 보이지 않는 방사능의 위험이 가장 두려운 존재다. 이 작품은 원전사고에 따른 공포를 매우 실감나는 영상으로 그려내고 있다. 원전이 폭발한 뒤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방사능이 점차 전국으로 번져가자 한반도는 그야말로 아비규환 속으로 빠져든다. 도로는 북으로 북으로 이동하려는 차량들로 인해 주차장화 돼버렸고, 철도와 항공 등의 대중교통 또한 통제 불능의 마비 상태에 빠지고 만다. 재난 상황을 진두 지휘해야 할 정부의 컨트롤 타워는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더구나 연료봉을 보관하고 있던 저장고마저 균열이 생기면서 2차 대폭발이라는 절체절명의 순간으로 치닫는다.



그러나 우린 이러한 아비규환 속에서도 작은 희망을 엿볼 수 있다. 원전이 폭발했다는 끔찍한 소식이 언론을 통해 급박하게 전해지자 월촌리 주민들을 수용 관리하던 경찰들은 내빼기 바쁘고, 폭발사고로 부상을 입거나 방사능 피폭으로 치명상을 입은 환자들을 치료하던 병원에서는 의사와 간호사를 비롯한 의료진들 모두 자기만 살겠노라며 일제히 도망간다. 


이 와중에 상처 입은 환자들을 차마 버리고 떠나지 못한 간호사(오예설)의 아름다운 손길과 치솟는 방사능 수치로 인해 피폭의 위협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구조활동에 나선 소방구조대원들, 그리고 발전소 운영을 총괄하던 소장(정진영), 재혁과 그의 동료 길섭(김대명)을 비롯한 직원들의 살신성인 정신이 있었기에 그래도 이 세상은 여전히 살 만한 것이라는 믿음을 준다. 눈물샘을 자극할 만한 코드도 제법 있으니 이러한 부분을 감안하고 관람해야 할 것 같다. 



감독  박정우


* 이미지 출처 : 네이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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