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좀비는 그저 거들 뿐, 본격 성장 영화 '아이 엠 어 히어로'

새 날 2016. 9. 22. 13:03
반응형

유명 만화 작가의 문하생으로 일하며, 틈틈이 개인 작품을 만들어 각종 대회에 이를 출품, 언젠간 만화계의 스티브 잡스가 되리라 꿈꿔 오던 히데오(오오이즈미 요)는 자꾸만 벌어지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좁히지 못한 채 점점 의기소침해져간다. 허구헌날 꿈만 쫓다가 놓쳐버린 세월 앞에서 급좌절하지 않을 사람은 드물 테다. 급기야 그와 동거 중이던 여자친구 텟코는 어느날 히데오에게 갖은 원망을 쏟아부으며 그를 집에서 쫓아낸다. 텟코의 행동이 다소 섭섭하긴 하나 그렇다고 하여 전혀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한편, 당시 일본 전역에서는 정체불명의 감염병이 전파되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있었다. 히데오를 집에서 쫓아낸 텟코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지 그에게 전화를 걸어 사과의 말을 건네고, 히데오는 기쁜 마음에 이것 저것 사든 채 그녀의 집을 찾아간다. 하지만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우편함 틈으로 집안을 살피니 텟코 홀로 침대에 누워 있다. 그때다. 이상한 행동을 보이던 그녀가 갑자기 히데오에게 덤벼든다. 간신히 그녀의 공격을 뿌리치고 놀라 밖으로 뛰쳐나온 히데오, 하지만 밖은 더 위험천만했다. ZQN 바이러스에 감염된 좀비들이 거리를 활보하며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물어뜯고 있었다. 그는 무작정 도망치기 시작하는데...



3년 연속 일본 만화대상을 수상한 하나자와 켄고의 만화 '아이 앰 어 히어로'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세계 3대 판타스틱 국제영화제에서 5관왕을 차지하며 일찌감치 작품성을 인정 받은 영화이기도 하다. 주인공 히데오의 이름을 우리말로 바꾸면 '영웅'이 된다. 지금은 한낱 만화 어시 일에 몸담고 있는 신세에 불과하지만 - 물론 이는 영화속 표현일 뿐 내 생각이 그렇다는 의미는 아니다 - 그도 한때는 자신의 이름처럼 영웅을 꿈꿨던 적이 있다. 히데오는 사실 15년 전 신인 작가상을 받으며 만화계에 화려하게 등단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이후 그가 내놓은 작품마다 빛을 보지 못한 채 그저 무기력하게 세월만 흘려보내야 했다. 


매사에 자신감이 없어 보이고 소심하기 짝이없는 그의 성격과 행동은 아마도 그가 보낸 시간의 흐름 그리고 텟코를 비롯한 주변의 따가운 시선 등에 의해 자연스레 형성된 성질의 것이리라 짐작된다. 그런 그의 바로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작금의 현실은 그저 놀라울 뿐이다. ZQN 바이러스에 감염된 좀비들은 닥치는 대로 사람을 공격하고 있었으며, 이로부터 탈출하느라 도시는 아비규환이었다. 히데오처럼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해 자발적으로 혹은 비자발적으로 히키코모리적 삶을 살던 사람들은 이 혼돈이야말로 둘도 없는 전복의 기회라 여겼을지 모를 일이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전혀 그렇지가 못했다. 히데오를 둘러싼 주변인들의 말로는 처참했다.



다양한 양태의 좀비들에게는 과거 인간이었을 당시 삶의 흔적이 남아 있다. 때문에 각 좀비들로부터는 나름의 독특한 행동 양식이 나타나곤 하는데, 이는 흡사 다양한 인간 군상과 그들의 욕망을 고스란히 묘사하는 듯한 느낌이다. 인간과 좀비가 공존하는 공간이자 인간에게 있어 마지막 남은 희망을 부여잡게 했던 '후지 아울렛'은 세상사를 축소해 놓은 모습 그 자체였다. 지상에서는 좀비떼들이 인간을 노리며 흔적을 좇느라 여념이 없었고, 좀비가 올라올 수 없도록 요새화된 옥상에서는 생존한 다양한 종류의 인간들이 무리 지어 살아가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일정 수준의 질서가 유지되고 있는 데다, 역할 분담 또한 비교적 체계적으로 이뤄지는 걸로 봐선 상층부엔 권력을 움켜쥔 자가 존재하는 등 계층이 형성되어 있음을 짐작케 한다.



하지만 그 권력이란 건 결국 힘에 의해 좌우될 수 밖에 없는 속성 중 하나다. 히데오가 탈출하며 손에 움켜쥐고 있던 취미용 엽총이 곧 권력이었다. 이를 누가 쟁취하느냐에 따라 권력 구도는 바뀌며, 총을 거머쥔 이들의 손바뀜에 따라 옥상의 분위기는 수시로 출렁거렸다. 지상에서 서성거리는 좀비들이 인간이었을 당시의 과거에 갇힌 채 마치 꿈을 꾸고 있는 양 같은 행위를 반복하며 욕망을 드러내는 것과는 달리, 인간들은 기존의 모든 체제가 리셋된 상황에서 어떡하든 현재 가장 시급한 욕망을 쟁취하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는 모양새다.



직접 가보진 못했으나 영화를 관람하면서 후지 아울렛의 전경이 왠지 언론 매체를 통해 자주 오르내리던 우리나라의 명품 아울렛을 빼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일본이 아닌 파주 아울렛 현장에서 촬영이 이뤄졌다는 후문이다. 아울러 지상에서 서성거리며 사람들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좀비들 역시 우리나라 배우들을 엑스트라로 활용했다고 한다. 


히데오가 좀비로부터의 탈출 도중 우연히 만나게 된 여학생 히로미(아리무라 카스미)는 몸의 절반 가량만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된 특이한 케이스다. 히데오는 그녀에게 있어 수호신이었으나, 히로미는 그 이상으로 그에게 더욱 남다르게 다가오는 인물이다. 히데오가 이 난세에 성장, 작은 영웅이 되게 한 원동력이 다름아닌 그녀였기 때문이다. '히데오 옆에 있으면 왠지 안전할 것 같아' 마치 꿈 속에서 읊조리듯 반복적으로 내뱉는 그녀의 이 말은 그의 잠재력을 깨우는 일종의 주술이었다.  



후지 아울렛 옥상에서 처음 만나 도움을 서로 주고 받으며 생사고락을 함께한 사이가 된 전직 간호사 야부(나가사와 마사미)는 병원에서 탈출 당시 환자들을 모두 놔두고 온 데 대한 심한 죄책감을 갖고 있었다. 반면, 히데오는 목숨이 경각에 달한 상황에서조차 피붙이도 아닌 히로미를 끝까지 보호해 주며 함께했다. 야부가 그를 신뢰하는 이유다. 히데오는 세상 보편적인 시각으로 볼 때 찌질이에다 루저에 가까운 사람이었으나, 야부와 히로미의 격려 덕분에 이 어렵고 험한 세상에 과감히 온몸을 내던지며, 비로소 잠재돼 있던 그의 능력을 긴 터널로부터 소환할 수 있게 된다. 


원작과 100%에 가까운 싱크로율을 자랑한다


시종일관 심장이 쫄깃해지는 몰입감은 가히 최고라 할 만하다. 비주얼 역시 어색함 없이 정교하다. 억지 신파 따위는 없다. 일본 영화에 대한 선입견을 날리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혼란스러운 영화속 상황처럼 어쩌면 특정 장르라고 콕 집어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쪽 저쪽 장르를 넘나드는 독특한 장르 파괴 형식은 어쩌면 이 영화만이 지닌 정체성일지도 모르겠다. 히데오의 턱밑까지 침투해 들어온 좀비 바이러스의 파괴력은 그야말로 엄청나다. 좀비에게 물어뜯겨 또 다른 좀비로 변해갈 때의 모습은 흡사 일본 공포 영화속 귀신 캐릭터 마냥 기괴하며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몇차례 등장하는 꽤나 잔인한 장면은 고어물에도 근접해 있다. 급작스레 등장, 언제 덤벼들지 모르는 좀비들이 만들어내는 살 떨리는 장면과 상황은 전형적인 스릴러 장르다. 


하지만 제목이 말해 주듯 이 영화는 일견 평범해 보이는 보통사람 혹은 사회에서 주목 받지 못하는 비주류에 대한 관심과 시선을 유도하고 있으며, 본격 성장에 대한 담론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우리가 별 것 없어 보이는 히데오의 좀비 사냥 모습에 희열과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던 건, 좀비의 머리가 산산조각날 때의 그 굉장한 타격감 때문이라기보다 평범한 보통사람이 무언가를 해냈다는, 그 놀라운 결과 때문이 아니었을까?



감독  사토 신스케


* 이미지 출처 : 다음영화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