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이상향을 향한 치열한 욕망...소설『은교』

새 날 2012. 7. 4.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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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 없지만, 노회한 시인 이적요와 그의 제자 서지우 그리고 여고생 한은교, 이들은 결국 한 인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적요 시인이 자주 언급해 온 추악한 기성 문단은 우리의 현실 사회를 풍자하는 것으로 보이고, 그와 그의 제자 서지우는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며 닳고 닳은 그런 저런 삶을 사는 소시민, 즉 우리네 보통 사람들의 모습을 상징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한은교는? 지극히 평범하며 발랄하고 당돌하기까지 한 여고생 은교는 시인 이적요가 살아 온 삶과는 대비되는, 어쩌면 현재의 삶을 리셋 내지 포맷하여 되돌리고픈, 늘 꿈 꿔온 이상향을 상징하는 인물이 아닐까 한다. 노시인이 여고생을 향해 품은 정염은 결국 현실에서의 자신의 모습에 대한 강한 부정과 그와는 반대 선 상에 놓인 이상향에 대한 욕망 분출의 한 양태로 읽혀진다.

 

문단과 일반 독자들에게 있어 이적요 시인은 평생 시만 써 온 고결하고 반듯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었다. 하지만 본인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70세 노인이 될 때까지 매우 주도면밀하고 철저하게 자신을 좋은 이미지로 채색해 왔으며, 실상은 매우 옹졸하며 음흉하고 까탈스런 고집불통 성격의 소유자인 것을 누구보다 본인이 더 잘 알고 있는 터다. 노시인은 생전에 자신이 남겨 놓은 노트를 통해 자신의 감춰 온 실제 모습을 만천하에 까발려 이 사회가 얼마나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차있는지를 통렬하게 한껏 비틀어 보려 시도한다.

 

시인 이적요는 외부의 시선을 위해 곱게 포장되어진 가짜 인물이고, 이는 '적요'라는 이름에서조차 느껴진다, 그의 본질은 제자 서지우를 통해 날 것 그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서지우가 생전에 남겨 놓은 일기장에는 두 사람이 은교를 사이에 두고 서로 질투하는 연적으로 묘사되어 있고, 그 둘의 사이가 갈수록 악화일로를 걷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서지우가 이적요 시인을 지칭하며 '정말 사랑한 사람은 노시인이었다." 라고 표현하는 대목에서 두 사람은 결국 같은 사람이란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노시인이 서지우에게 툭 하며 던지는, 아니 서지우가 죽는 그 날까지도 그에게 내뱉던, "멍청한 놈" 이란 표현은 실상 노시인 자신에게 쏟아내는 일종의 신랄한 자기 경멸의 언어다. 이처럼 자신의 현실적 삶을 경멸하면 할수록 반대로 투명하기 그지 없는 은교에 대한 욕망은 더욱 커져만 가고, 그럴수록 은교란 인물은 넘사벽의 이상향이 되어 간다.

 

은교를 볼 때마다 온 몸으로부터 분출돼 올라 오는 욕정을 노시인은 끝끝내 억제한다. 물론 매번 갈등을 겪으며 치열하게 자신의 내부에서 전쟁을 치뤄내지만 그래도 노인의 연륜으로 이 정도의 본능 쯤은 충분히 이겨낸다. 반면 노시인의 본질에 가장 근접한 인물인 서지우는 은교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녀에게 대시한다. 하지만 이는 번번이 실패하고 그럴 때마다 자주 가는 카페를 찾아 여종업원과 오직 육체적 교감만이 있는 섹스를 즐긴다. 아니 평소에도 이 카페에 자주 들러 왔고, 그럴 때마다 여종업원과 몸을 섞어 왔던 터다.

 

서지우는 죽기 전날 결국 은교와의 교합에 성공한다. 노시인과 서지우는 은교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의심하고 비난해 왔으며, 은교 즉, 이상향을 향한 치열한 심리전을 벌여 나간다. 어쨌든 이들의 목표는 서로가 아닌 척 하면서도 오직 하나, 은교에 있었다. 여기에서 서지우와 여종업원, 서지우와 은교와의 섹스 또한 현시창(현실은 시궁창)과 이상향의 또 다른 대비를 위한 장치로 엿보인다, 그러다 결국 서지우는 은교를 범하게 되고, 서지우와 이적요, 이 두 사람은 차례로 죽음을 맞이하며 은교라는 이상향의 모습으로 환골탈태하게 된다. 이적요의 본질은 다시 은교라는 인물을 통해 새롭게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서지우와 은교와의 교합은 이제껏 거짓과 위선으로 점철된, 그렇고 그런 이적요의 가짜 삶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삶이 시작됨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대학생이 된 은교는 어느 날 이런 말을 넌지시 던진다. "시를 쓰기 시작했어요." 그와 동시에 이적요와 서지우가 각각 남긴 노트와 일기를 훌훌 태워 버린다. 이적요와 서지우의 억지스러웠던 과거의 삶은 한 줌의 재와 함께 허공에 흩뿌려진다. 그렇다면 이는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다. 이적요 시인이 남긴 노트는 비록 태워졌지만, 노트를 묶고 있던 끈은 아직 은교의 손에 들려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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