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르의 전설

맹수에서 곰탱이로, 말라뮤트의 변신은 무죄

새 날 2016. 6. 30.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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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따라 주인님의 표정이 어딘가 비장하다. 더구나 양손에는 빗과 가위까지 들려 있다. 나를 앞에 앉힌다. 평소 같았으면 재롱을 떨며 쓰담쓰담해 달라고 조를 판인데, 왠지 그럴 분위기가 아닌 눈치다. 감각이 아무리 둔하다 해도 이 정도의 눈치쯤은 내게도 있다. 그래, 그냥 얌전히 있어야 하는가 보다. 이윽고 무한 빗질이 시작된다. 손놀림이 무척 빠르다. 다만, 나의 엉킨 털 덕분인지 손놀림에 비해 진도는 영 더디다. 


주인님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기 시작한 건 이 즈음이다. 빗이 내 몸을 한번씩 훑고 지날 때마다 엉킨 털에 걸리며 내 몸이 통째로 휘청거린다. 평소 같았으면 꾀를 부려 요리조리 몸을 뺐을 법도 한데, 적어도 지금은 그럴 만한 여건이 아니다. 주인님의 빗질이 순간 멈춘다. 그러더니 빗을 쥐고 있던 손에는 다시금 가위가 들린다. 



헐.. 이게 무슨 시추에이션? 그러니까 지금 나의 털을 깎기라도 하겠다는 심산인가? 어찌 대처해야 할지 나름 머리를 굴려 보았으나, 아뿔싸... 미처 손 쓸 겨를조차 없다. 주인님의 손에 들린 가위가 나의 털을 인정사정 없이 자르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주인님의 마음 씀씀이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사람의 체온보다 적어도 2-3도는 높은 데다 영하20도 이하의 혹한에서도 견뎌낼 정도의 두터운 이중모로 덮여있는 나의 몸, 그러니까 여름철만 돌아오면 더위 탓에 완전히 녹초가 되곤 하는 나를 배려하기 위한 애정 어린 조치였던 셈이다.


주인님의 손놀림으로부터는 단 한순간이라도 주저함 따위를 일절 찾아볼 수 없다. 그야말로 날렵한 솜씨다. 휙휙 지나간다. 가위가 스쳐간 자리에는 내몸을 감쌌던 거대한 털뭉치들이 뭉텅이로 깎인 채 바닥 여기저기에 떨어지며 흩어진다. 나의 정체성이랄 수 있는 털을 이런 식으로 깎아버리다니, 아무리 주인님이라고 해도 이건 정말 너무하다 싶다. 정나미가 뚝뚝 떨어지지 않을 수 없다. 


흡사 맹수와 같은 아우라를 뿜어내던 나의 얼굴과 목 언저리 경계 주변의 털을 모두 밀어내더니, 내 머리통을 그냥 평범하기 짝이없는 흔한 멍멍이상 혹은 미련 곰탱이의 그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꼬리털은 또 어떤가. 풍성한 흰털에 윤기마저 자르르 흐르고, 이를 또르르 말아 힘껏 세워 올릴 때면 주변의 모든 생물체들이 나의 자태에 한껏 주눅이 들곤 했는데, 이를 인정사정 없이 모두 잘라 버린 것이다.



내심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우울하다는 표현이 적확할 듯싶다. 덕분에 기운을 차릴 수가 없어 하루종일 한쪽 귀퉁이에 쭈그려 앉은 채 우두커니 자리를 지켜야 했다. 해가 뉘엇뉘엇 넘어가던 즈음이다. 작은 주인님이 퇴근하는 소리가 들린다. 반가웠지만 오늘만큼은 당췌 격한 반응을 보일 수가 없다. 그냥 누운 채 집으로 들어서는 주인님을 눈짓으로만 바라보며 털이 모두 깎인 뒤라 영 불품 없어 보이는 꼬랑지를 살랑살랑 흔든다.


"미르, 잘 있었냐, 더웠지?" 


작은 주인님의 목소리를 들으니 왠지 울컥한다. 내가 당한 고초를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굴뚝 같았던 모양이다. 그나마 작은 주인님은 평소 나와 제일 많은 시간을 함께해 주던 사람이었기에 왠지 내가 오늘 당한 일을 가장 잘 이해해 줄 것만 같았다. 내 몸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작은 주인님에게 모두 이실직고하고 싶었다. 


"어머, 미르 너 왜 이런 거니? 얼굴이 이게 뭐야? 가만 보자. 꼬리도 형편없네? 도대체 누가 너를 이렇게 만든 거지?"



드디어 작은 주인님이 작금의 뜨악한 상황을 파악한 모양이다. 작은 주인님 내외가 주고 받는 말을 들으니 나더러 '몽실이'가 됐다며 어떡하면 좋으냐고 푸념을 늘어놓고 있었다. 도대체 몽실이가 어떤 개이길래 나와 비교하는 걸까. 평소 허당 맹수라며 날 놀리던 작은 주인님이었지만, 막상 나의 털이 뭉텅이로 깎여나간 몰골을 보더니 몹시도 속이 상했던 모양이다. 다시 예전의 내 모습을 찾으려면 인고의 시간을 견뎌야 할 테며, 당분간 산책도 쉽지 않다. 이런 꼴을 한 채 밖으로 돌아다니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 말이다. 이런 제기럴..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난 말라뮤트니까.. 


털이 뭉텅이로 깎여 비록 볼품 없는 모습이지만 그건 단순히 외양만 그러할 뿐, 나의 본질은 여전하다. 이 또한 지나가리니, 아울러 우리는 어떡하든 방법을 찾을 것이니, 조만간 나는 맹수처럼 용맹한 애초의 얼굴로 돌아올 수 있을 테고, 윤기 자르르 흐르는 풍성한 털로 말아올려진 멋진 외양의 꼬리를 다시금 선보일 수 있을 테다. 


난 말라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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