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 그리운 날엔

최양락의 '재미있는 라디오' 폐지는 청취자를 향한 모욕이다

새 날 2016. 6. 12.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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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헬스장에서 운동할 때마다 지루함을 달래고자 라디오 주파수를 요리조리 돌리곤 하던 게 일상 중 하나였다. 그럴 때면 유독 내 청각신경을 자극해오던 프로그램 하나가 있었다. 김영삼 전두환 그리고 이명박 등 전임 대통령의 성대 모사를 통해 퀴즈를 푸는 코너였는데, 어찌나 재밌고 유쾌하던지.. 그 뿐만이 아니었다. 대중들에게 당시 가장 핫한 정치인들의 성대 모사도 곧잘 다뤄지곤 했으며, 제법 비슷했다. 이들이 출연하여 정치 현안들을 재치있게 풍자하는 코너 역시 언제나 배꼽 빠지게 만들었다. 개그맨 최양락이 진행하는 MBC 표준 FM의 '재미있는 라디오(이하 '재미라')'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하지만 이를 듣지 않게 된 지는 벌써 한참이다. 얼마 전 단행된 프로그램 개편 당시 '재미라'의 정체성이자 내 청각세포들을 온통 곤두세우게 했던 핵심 코너들이 은근슬쩍 자취를 감췄기 때문이다. 시사풍자 코너 대신 다른 콩트를 넣었지만 감흥이라곤 전혀 없었다. 재미가 반감되는 건 지극히 당연했다. 더구나 헬스장마저 때려치우고 산책로에서 운동을 시작하면서부터 라디오는 내게서 더욱 멀어져갔다. 최근 해당 프로그램이 아예 폐지됐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꽤나 오래된 장수 프로그램이거늘, 최양락 씨의 마지막 작별인사조차 없이 그냥 그렇게 조용히 사라지고 말았단다.


ⓒMBC


MBC 라디오국은 지속적인 청취율 하락세를 이어온 해당 프로그램에 대해 경쟁력 강화 차원에서 이번 춘하계 정기 개편을 통해 폐지할 수밖에 없었노라고 항변한다. 라디오는 오로지 청각에 의존해야 하는 매체이기에 무엇보다 청취율이 지상과제라는 사실을 나 역시 모르는 바는 아니다. TV가 시청률에 목숨을 걸듯, 청취율 제고는 그들에게 있어 숙명과도 같다. 그렇다면 최근 청취율 급락세를 보여온 '재미라'의 폐지는 특별히 문제될 소지가 없어 보인다. '재미라'뿐 아니라 그 어떤 프로그램인들 치열한 경쟁에서 도태될 경우 비슷한 전철을 밟아왔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번 '재미라'의 경우는 다른 사례에 비해 할 말이 제법 많다. 왜일까? 


'재미있는 라디오'에서의 '재미'란 바로 이 프로그램의 정체성이자 존재의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만에 하나 '재미'를 잃게 된다면 해당 프로그램은 존재할 가치가 사라지는 결과와 진배없다. '재미라'는 2000년대 초반부터 시사풍자 라디오 전성기를 이끌던 대표적인 프로그램이다. 때문에 여기서의 '재미'란 다름아닌 시사풍자에서 기인한다. 나 역시 대통령 성대 모사와 정치인들의 시사풍자가 담긴 토론 및 콩트에 자연스레 매료되어 애청자가 됐던 사람이다. 지난 2002년부터 14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최양락이라는 한 사람이 오롯이 이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을 수 있었던 건, 그만의 부단한 노력과 함께 그만큼 청취자들에게 유별난 재미와 감동을 선사할 수 있었기 때문일 테다. 



하지만 MBC의 입장에서는 시사풍자를 정체성으로 하는 해당 프로그램이 눈엣가시였던 모양이다. 물론 최근의 MBC를 생각해보면 전혀 이해 못 할 바도 아니다. 앞서도 언급했듯 MBC는 지난 2014년 '시즌2'라는 명칭의 대대적인 개편 당시, 해당 프로그램의 핵심 코너를 모두 다른 것들로 대체하고 만다. 우리에게 늘 통쾌한 웃음을 선사해주었던 '대통퀴즈' '대충토론' 등의 코너는 모두 사라졌고, 대신 다른 콩트가 그 자리를 꿰찼다. '재미라'의 수족을 모두 떼어버린 셈이다. 


정체성을 잃은 이 뜨악한 현실 속에서 청취율이 높아지기를 바란다는 건 결국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까 방송국 측은 청취율 저조와 인기 하락을 이번 프로그램 폐지의 사유로 들고 있으나 이는 전적으로 MBC 스스로가 자초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물론 MBC의 근황을 돌아보면 지금까지 이 프로그램이 폐지되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던 그 자체가 그저 놀라울 따름이긴 하다. 


너무도 아쉬운 대목이라 결코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결과지만, 어쨌거나 '재미라'는 14년의 역사를 뒤로 한 채 이제 우리 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최양락 씨도 떠났다. 그것도 14년이나 이 프로그램을 이끌어오던 사람이거늘, 마지막 방송 멘트가 나가는 그 순간까지 그는 자신의 프로그램이 폐지되는 사실조차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어떻게 이토록 잔인할 수 있을까. 아무리 눈 밖에 난 프로그램이었다고는 하나 적어도 프로그램을 이끌어가던 사람에게만큼은 귀띔 정도는 해주어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MBC


이는 최양락 씨 개인에 대한 모욕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MBC의 청취자를 향한 모욕으로 받아들여진다. 왜냐하면 청취자와 방송국 사이를 간접적으로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건 결국 최양락 씨와 같은 진행자이기 때문이다. 청취자를 얼마나 우습게 알면 그들과의 접점에서 14년을 꿋꿋하게 지켜온 진행자가 애청자들을 향해 마지막 인사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걸까? MBC의 정체성이야 이제는 새삼스럽지도 않기에 '재미라'의 폐지는 일종의 수순밟기라고 치자. 하지만 정작 중요한 문제는 프로그램의 폐지라기보다 십수 년 동안 굳건하게 지켜왔던 진행자에 대한 홀대와 이러한 볼썽사나운 현상을 청취자들로 하여금 고스란히 지켜보게 만든 MBC의 몰상식한 행태에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저는 다음주 월요일 8시 30분에 생방송으로 돌아올게요! 웃는 밤 되세요~"


최양락 씨의 마지막 멘트다. 이 말을 끝으로 해당 프로그램은 결국 폐지됐으며, 최양락 씨는 적어도 '재미라'를 통해서만큼은 다시는 우리 곁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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