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일베 조형물 파손, 용기인가 폭력인가

새 날 2016. 6. 1.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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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모 사립대학교 정문에 일베를 형상화한 조형물이 얼마 전 설치됐다. 속사정을 알 방도가 없는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이게 웬 뜬금없는 현상인가 싶었으리라. 나 역시 비슷한 심경이었다. 아울러 우리 사회에는 일베 하면 유독 앞뒤 가리지 않고 눈을 부라린 채 달려드는 이들이 워낙 많은 상황이라, 즉 세상은 오로지 '일베하는 자'와 '일베하지 않는 자'로 양분된 터라, 이후 무수한 논란이 벌어지리란 건 누구나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해당 조형물이 왜 그곳에 설치되었는가에 대한 전후 사정과는 관계 없이 이를 제작한 이와 학교를 비난하는 글들이 온라인과 SNS상에 온통 쇄도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조형물은 설치된 지 불과 수십 시간만에 '성큰'이라 불리는 랩퍼에 의해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이러한 행동을 두고 온라인에서는 또 다른 논쟁으로 불이 옮겨붙고 있는 양상이다. 학교의 이미지를 크게 실추시킨 데다 사회적 논란마저 야기시킨 조형물을 파괴한 것은 상당히 용기있는 행동이었노라며 이를 칭찬하는 측과, 보다 충분한 여론을 수렴하고 나서 총학생회나 학교와의 협의를 통해 철거 여부를 결정한 뒤에 행동해도 결코 늦지 않았을 것을, 이를 파손한 것은 결국 폭력적인 행위에 불과하다는 의견이 서로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사실 해당 조형물이 설치된 내용이 알려진 뒤 대중들이 보였던 반응과 대동소이하다. 조형물의 설치에 따른 전후 사정을 전혀 모르는 상태라고 가정한다면 크게 두 가지 반응으로 압축된다. 우선 무조건적인 거부감을 보이는 경우다. 일베를 향한 혐오 현상은 이미 사회 전반에 뿌리 깊게 자리잡은 상태로, 그동안 일베라는 커뮤니티가 우리 사회에 끼친 물의와 해악을 고려한다면 이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누가 보아도 왜 그러한 상징물이 학교 정문에 설치되어 있어야 하는가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더구나 해당 학교의 재학생이나 졸업생 신분이라면 자신의 학교 이미지를 크게 실추시키는 행위로 받아들였음직하다. 


또 다른 반응은 뭐랄까, 그래도 나름의 속사정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경우다. 일베를 형상화한 조형물이라고 하여 그 자체를 무조건적으로 혐오하거나 거부하기보다 예술 계통이 유독 강한 면모를 보이는 이 학교만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 정확한 전후 사정이 드러날 때까지 가치 판단을 일단 보류하자는 주장이다. 아울러 일베라고 하여 표현의 대상이 되어선 안 된다는 편협한 시각보다는 다소 거부감이 들기는 해도 작가의 의도나 표현의 자유에 대해서만큼은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는 경우도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조형물은 크게 파손됐다. 몰래 하거나 우발적인 행위도 아니다. 상당히 의도되고 계획된 행동이었으며, 작가나 학교 측에서 법적 책임을 묻겠다면 당당하게 책임을 지겠노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아무리 예술성을 내포한 작품이라고 해도 사회적 논란이 될 것이 뻔한 조형물을 대학교 정문 앞에 설치한 정황에 대해선 선뜻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아래에서 작가의 의도가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지금처럼 일베의 상징물이라는 이유만으로, 아울러 누군가가 제작한 조형 작품임이 밝혀졌음에도, 이에 대해 무차별적인 비난을 가하고 폭력 행위가 이뤄지는 건 일베 그들이 평소 일삼아온 혐오 행위와 뭐가 다른 것이며, 마녀사냥과 차별화할 수 있는 게 과연 무엇인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일베하지 않는 사람은 일베하는 사람에게 무차별적인 마녀사냥을 벌여도 괜찮다는 의미일까? 오로지 일베하지 않는 사람이 일베하는 사람보다 도덕적인 우위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 지점에서 작가의 의도를 한 번 살펴보자. 이 학교 조소과에 재학 중인 제작자에 따르면 작품명은 ‘어디에나 있고, 아무 데도 없다’이며, 일베를 옹호하느냐 비판하느냐와 같은 이분법적인 의도가 담긴 게 아닌, 사회에 만연하지만 실체가 없는 일베를 보여줌으로써 논란과 논쟁을 벌이는 것이 작품의 의도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학교 정문에 이를 설치한 건 바로 외부인도 볼 수 있도록 배려한 다분히 의도적인 장치였으며, 작금의 논란 역시 애초 이를 염두에 두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성큰의 조형물 파손 행위는 진정한 용기일까 아니면 만용일까 그도 아니면 폭력행위일까? 작가의 작품에 관한 설명이 사실이든 아니든 조각상을 부순 행위 자체는 그 어떠한 변명으로도 용서 받을 수 없는 폭력 행위임이 명백하다. 용기는 절대로 아니며 만용도 결코 아니다. 파괴된 해당 작품은 '환경조각연구 야외조각전’에 수업 과제로 제작되어 오는 6월 20일까지 전시될 예정이었단다. 일각에서 언급하고 있는 '일베의 상징을 형상화한 게 표현의 자유라고 한다면, 이를 파손해놓은 결과물도 결국 표현의 자유'라는 묘사는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이 학교가 왜 유독 일베에 민감한가에 대해선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판단된다. 지난해 이 학교의 교수가 일베 교수로 낙인이 찍히는 사례가 있어 학교 명예 차원에서라도 일베와의 연결고리는 여러모로 부담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베라는 커뮤니티가 일반인들에게 혐오감을 불러오고 있는 주요 이유는 다름아닌 지역 감정을 유발하거니 여성 등 약자를 괴롭히는 혐오 행위 때문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그러한 일베가 혐오스럽다며 아직 작가의 의도나 조형물이 설치된 전후 사정이 제대로 해명조차 되지 않은 작품을 부숴버린다면 일베의 혐오 행위와 뭐가 다를까? 우리가 일베보다 도덕적 우위에 설 수 있었던 건 바로 일베에는 없는, 타인에 대한 배려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존중 따위가 아니었던가? 일베 상징 조형물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을지언정, 이는 결국 우리 내부에 꼭꼭 감춰져있는 또 다른 형태의 '일베'를 밖으로 드러내며 포효하는 결과밖에 더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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