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르의 전설

미르에겐 벅찬 비둘기들의 만행

새 날 2016. 4. 20.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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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비둘기만 보면 어찌할 바를 모르는 한 아이가 있다. 올해 중학생이 되었으니 이젠 아이라는 표현이 조금은 어색하긴 하지만 말이다. 얼마나 비둘기를 싫어하냐면, 입에서 '비'자만 나와도 질겁을 한다. 학교에 다닐 때에도 비둘기들이 있는 곳은 일부러 피해 빙 돌아간다며 또래들 사이에서도 '비둘기 공포증'으로 꽤나 유명한 아이이다. 왜 싫으냐고 물으면 그냥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 뿐, 아예 비둘기 얘기조차 꺼내지 못하게 한다. 얼마나 싫은 건지 대충 짐작케 하고도 남는다. 어릴적 비둘기와 관련한 좋지 않던 기억이 뇌리에 강하게 박혀 트라우마로 작용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 사실 비둘기는 우리집 반려견의 밥상을 호시탐탐 노리곤 하여 나도 녀석들에 대한 감정이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이다. 미르 이 녀석은 덩치만 컸지, 자신의 밥을 비둘기들이 먹든 말든 그다지, 아니 전혀 관심이 없는 눈치다. 하긴 아무리 배가 고파도 실수로 혹은 의도적으로 바닥에 흘린 사료에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 녀석이거늘, 어쩌면 이러한 현상은 지극히 자연스러울지도 모를 일이다. 도도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는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미르의 사료 그릇을 다른 곳으로 치우는 일이다. 날이 희붐하게 밝아오기 시작하는 새벽녘이면 미르의 사료를 노리는 비둘기들이 '구구~'하며 연신 신호를 주거니 받거니 한다. 짐작컨대 이곳에 밥이 많으니 배불리 먹고 가자는 신호로 읽힌다. 그 즈음 밖으로 나가 보면 이런 가관도 없다. 수 마리의 비둘기들이 미르의 사료 그릇 주변에서 사료를 주워 먹느라 온통 북새통이다. 물론 미르 녀석은 그러든지 말든지 졸린 눈을 연신 꿈벅거리고만 있다. 이렇게 한심스러운 노릇이 다 있나.

 

비둘기들은 날이 갈수록 점점 대담해져갔다. 가득 채워진 미르의 물 그릇에 담긴 물이 가끔씩 매우 더럽혀져 있곤 하여 궁금하던 차였으나 그때마다 그냥 모른 척 새 물로 갈아주었다. 그러던 어느날의 일이다. 난 기어코 못 볼 꼴을 보고야 말았다. 미르는 여전히 자신의 자리에 누워 가장 편한 자세를 취한 채 쉬고 있고, 그 옆에 놓인 미르의 물 그릇에서는 비둘기들의 버라이어티한 목욕 쇼가 진행되고 있었던 거다. 아뿔싸, 가끔 미르의 물이 매우 더럽혀졌던 건 다름아닌 비둘기들이 목욕을 한 흔적이었던 셈이다. 

 

 

비둘기들의 만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주차장 공간으로 마련해놓은, 입구만 트인 공간을 설마 침투해 들어올까 싶어 미르의 사료 그릇과 물 그릇을 그곳 깊숙이 옮겨놓곤 했는데, 실은 숨겨놓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듯싶다, 주차장을 지나칠 때면 그 안에서 갑자기 비둘기 수 마리가 퍼드득 거리며 도망가곤 하여 나로 하여금 기겁하게 만들었던 거다. 미르가 자신들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확신이 선 탓인지 미르는 아예 안중에도 없었고, 심지어 사람의 생활 공간까지 겁도 없이 마구 침투해 들어오는 비둘기들이었다.

 

누렇고 뿌옇게 변한 미르의 물 그릇, 아울러 얼마나 강탈 당했는지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미르의 빈 사료 그릇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는 천불이 올라온다. 물론 비둘기 녀석들도 다 먹고 살자는 본능에서 비롯된 행동인 데다, 가뜩이나 도심속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신세라 불쌍하다면 불쌍한 처지이다. 하지만 이쯤되면 정도가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이 앞서지 않을 수 없는 거다. 미르를 얘기할 때면 흔히 큰 덩치를 빗대 말하곤 한다. 하지만 외모로는 늠름한 맹수의 골격을 갖추고 있으나, 하는 짓은 영락 없는 허당이다.

 

 

물론 녀석도 처음엔 비둘기들의 만행에 저항했으리라 짐작된다. 과거 비둘기 한 마리를 입으로 물어 아작을 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르는 결코 꿈꿀 수 없는 날개를 가진 녀석들의 지속적인 공격에 두 손 두 발 모두 들었는가 보다. 미르의 밥과 물을 향한 비둘기들의 집요한 난동에도 불구하고 녀석의 얼굴로부터는 달관한 표정과 기색이 역력하다. 심지어 평온함마저 전해져온다.

 

안타깝지만 현재로서는 딱히 묘수가 없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비둘기들을 쫓고, 미르의 사료 그릇과 물 그릇을 멀리 치우는 방법 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다. 그런데 비둘기 공포증을 자처하는 아이가 이 시점에서 문득 떠오르는 건, 갈수록 영악해지고 대담해져가는 비둘기들을 바라보며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으니, 나 역시 이 녀석들이 점점 공포스러워지고 있기 때문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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