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메르스 종식? 인간다움 결여된 언론 보도 행태

새 날 2015. 11. 25.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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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모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 메르스 환자의 동생이라고 하는 분의 글 하나가 올라왔습니다. 자신의 형이 메르스 때문에 5월말 격리된 채 반년 넘게 갇혀 있었는데, 기저 질환인 림프종, 그러니까 일종의 혈액암에 걸린 상황에서도 메르스로 인한 격리 때문에 제대로 된 항암 치료를 받지 못해 죽게 생겼다는 안타까운 내용입니다. 당시 그는 형의 생명이 사흘 정도 남았다는 의사의 소견을 밝히면서 이 나라에서는 전염병에 걸리면 자살을 추천한다는 등 국가에 대한 심한 회의와 배신감 따위를 토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글이 올라온 지 정확히 이틀만에 해당 환자는 사망하고 맙니다. 우리에게는 마지막 메르스 환자로 알려진 80번 환자가 25일 새벽에 숨을 거둔 것입니다. 80번 환자에 대한 안타까운 사연은 동생이 커뮤니티에서 언급한 것처럼 언론 보도를 통해서도 이미 알려진 사실이기도 합니다. 병원 측은 메르스의 감염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진단했지만, 질병관리본부가 격리 해제를 미루고 있었으며, 가족들의 입을 빌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병원 측과 질병관리본부가 이렇듯 책임을 서로 떠넘기는 사이 림프종을 앓고 있던 해당 환자가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터넷 커뮤니티 캡쳐

 

80번 환자는 지난해 림프종 판정을 받고 골수이식수술 끝에 건강을 되찾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올해 5월 발열 증상이 나타나 병원에 들렀다가 메르스 확진 판정을 받은 뒤 완치된 줄 알았던 림프종마저 재발하는 불운이 닥치고 맙니다. 이때부터 그는 항암 치료와 메르스 치료를 동시에 받기 시작했는데, 메르스 검사에서 음성과 양성이 번갈아 나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두 개의 질병이 동시에 그의 몸을 할퀴고 있는 까닭에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엿보이긴 합니다만, 혈액 속의 암세포를 잡기 위해 항암제를 투약하면 면역력이 떨어져 메르스 바이러스가 번지고, 메르스를 없애려고 항암제를 끊으면 림프종이 악화되는 극심한 딜레마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던 지난달 3일 그는 우여곡절 끝에 메르스 완치 판정을 받고 격리에서 해제됐습니다. WHO에 보고된 메르스 환자 중 가장 오랜 기간 양성 반응을 보인 환자라는 진기록도 세웠습니다. 하지만 일주일 후 림프종의 병세가 악화된 탓에 다시 열이 치솟아 병원행을 택했고, 이 과정에서 혹시나 했던 메르스 진단 검사 결과 또 다시 양성 판정이 나오고 만 것입니다. 그 길로 그는 다시 한 번 음압 병실에 격리되는 신세가 되었으며, 메르스에 재감염되거나 재발한 것이 아닌 탓에 주변 사람을 감염시킬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는 진단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의료진은 질병본부의 결단이 있어야 격리를 해제할 수 있다고 하고, 질병본부는 병원이 알아서 판단할 일이라며 서로가 책임을 미루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환자는 제때 항암치료를 받지 못했고, 암세포가 그의 몸에 퍼질 대로 퍼져 버려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으로 내몰린 끝에 25일 숨을 거둔 것입니다. 올해 나이 불과 35세에 불과한, 암과 메르스라는 두 복병과 동시에 맞닥뜨리게 된 이 환자의 운명은 참으로 얄궂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지극히 치료가 어려운 처지에서 의료진이나 질병본부의 판단 역시 쉽지 않았으리라 짐작되는 대목이긴 합니다. 하지만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토대로 놓고 볼 때, 병원과 질병본부 사이에서 서로 판단을 보류한 채 책임을 떠넘기는 사이 두 개의 질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환자의 상태가 도저히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치닫게 된 것 역시 엄연한 사실입니다.

 

오늘 오전 언론들은 일제히 80번 환자의 사망 소식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사들의 제목을 살펴보던 전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의 사망 소식을 전하면서 메르스가 마침내 종식됐다는 보도 일색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마지막 메르스 환자였으니 그의 죽음과 동시에 메르스가 종식된 건 엄연한 사실인데,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어 보이는 기사 제목으로부터 전 왜 섬찟한 느낌을 받아야 했을까요? 기사를 보던 순간 이 포스팅의 서두에서 꺼낸 80번 환자 동생이 며칠 전 커뮤니티에 남겼던 글 내용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질병관리본부 공무원님들 축하드립니다. 메르스 결국 종식 되네요. 그토록 바라던 마지막 환자 죽음으로요.."



"[단독]마지막 메르스 환자 사망…다음달 23일 메르스 종식 선언"

"마지막 메르스 환자 사망...6달 만에 메르스 '제로'"

 

기사들은 온통 마치 그의 죽음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한 뉘앙스입니다. 즉, 메르스의 공식 종식이 80번 환자 때문에 자꾸만 늦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은연 중 내비치는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절대로 그럴 리 없음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80번 환자의 유가족들이 그의 죽음 때문에 많이 힘들어 하고 억울해 하는 심정은 백번 이해가 가나, 비록 병원과 질병관리본부가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심각한 문제가 불거지긴 했어도, 일부 네티즌들이 제기하고 있는 것처럼 메르스의 종식을 앞당기기 위해 80번 환자의 죽음을 일부러 방관했을 리는 절대로 만무합니다. 이는 지나친 과잉 해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별개로 제겐 기사 제목들이 몹시 거북하고 못마땅하게 다가옵니다. 모두가 마치 그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거나 환영하기라도 하는 양 벌써부터 메르스의 종식에 대해 떠들고 있는 게 아닌가요. 80번 환자의 사연이 언론을 통해 이미 알려진 상황이었고, 따라서 그와 그의 가족들이 겪었을 고통을 헤아리고 있었다면 과연 이런 식의 기사 제목이 가능한 걸까요? 전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에 하나 기자님들 자신의 가족이 80번 환자와 그의 가족이 경험했던 고통을 똑같이 겪었다면 과연 기사 제목을 이렇게 뽑아낼 수 있었을까요? 메르스 종식,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생명이 무척 석연치 않은 상황에서 목숨을 잃었고, 그가 다름아닌 메르스 마지막 환자였다는 사실, 아울러 그의 죽음과 동시에 모든 언론들이 일제히 메르스 종식을 꺼내들었다는 이 기막힌 현실을 절대로 간과해선 안 될 노릇입니다.

 

메르스가 하루빨리 종식되어 국민들 앞에 공식 선언하고 싶어 안달이 난, 성과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정부야 그렇다손 쳐도 어떻게 기자님들마저 이러한 성향의 정부와 똑같은 생각을 갖고 그들을 대변하는 듯한 행동을 취할 수 있는 걸까요? 정부의 입장보다는 안타까운 상황에서 억울하게 숨져간 80번 환자의 죽음을 더욱 부각시켜야 올바른 언론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대목에서 문득 떠오르는 게 하나 있습니다. 우린 혹시 인간다움이라는 가장 기본을 망각한 채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요? 인간 그 자체이기에 서로를 존중하고 존중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어느덧 새하얗게 잊어버리기라도 한 건 아닐까요?

 

WSJ 서울지국장 트위터 화면 캡쳐

 

그런데 어쩌면 작금의 현상은 결코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대다수의 우리 언론이 사회적 공기로서의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채 권력의 대변인 노릇을 자처한 지는 이미 오래 전의 일입니다. 물론 그렇더라도 일말의 기대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을 접하다 보면 이제는 작은 기대감마저 점점 멀어져가는 느낌이라 그저 아득해질 따름입니다.

 

시위 중 부상을 당한 환자를 이송하기 위한 구급차와 의료진들에게까지 최루액이 섞인 물대포를 마구 직사해 놓고도 실수로 그럴 수 있다고 하거나, 집회에 참석한 국민들을 향해 IS 테러 집단과 동일시하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정부를 바라볼 때, 비단 언론계라고 하여 예외가 아니듯이 정파나 진영 논리 따위를 떠나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존중과 예의가 사라지고 인간다움이 결여돼가고 있는 작금의 현실은, 몰상식한 기운이 만연한 우리 사회에서는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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