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대통령의 비밀주의가 우려스러운 이유

새 날 2015. 6. 16.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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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의 일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워싱턴 포스트와 인터뷰를 가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는데요.  이를 통해 박 대통령은 위안부 문제에서 상당한 진전이 있었으며, 현재 일본과의 협상 마지막 단계에 와 있다는, 그야말로 깜짝 놀랄 만한 뉴스거리를 선사해 주었습니다.  이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자면,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일을 일주일도 채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서 꼬여 있는 한일관계를 풀 수 있는, 무언가 획기적인 진전이 있었던 것으로 해석되는 상황입니다.

 

아베 정권이 들어선 이후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는 한일관계는 마치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느낌입니다.  군사대국화를 꿈꾸며 호시탐탐 주변 국가를 위협해 오는 행위는 물론,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과거사에 대한 반성은커녕 뻔뻔스레 역사 왜곡 등을 반복하고 있고, 독도 영유권 주장, 그리고 최근엔 일본 근대산업시설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등 우리와의 관계가 실타래처럼 마구 얽혀 있는 탓입니다.  올해가 광복 70주년과 한일국교 정상화 5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임에도 불구하고 한일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냉랭한 관계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거사 반성 없이 일본과의 정상회담은 일절 없다며 강경 일색으로 대응해 오던 박 대통령으로부터 과거사의 핵심이랄 수 있는 위안부 문제에 진전이 있으며 마지막 단계에 와 있다는 발언이 나온 건, 교착 상태에 빠진 한일관계에 있어 곧 새롭거나 획기적인 전환점이 마련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최근 두 분의 위안부 할머니가 같은 날 별세하는 가슴 아픈 사연이 전해진 바 있는데요.  박 대통령의 발언은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로 인해 절규하고 계실 이분들께도 희망으로 다가오는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해당 인터뷰 내용에 대한 일본의 반응은 전혀 달랐습니다.  의아함을 넘어 불쾌감 일색입니다.  일본 정부의 고위 관계자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발언이다. 말하는 건 자유지만 박 대통령이 말하는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얼 의미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고 이를 묻는 기자들에게 답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언론들 역시 비슷한 반응입니다.  '요미우리신문'은 13일 "일한의 협의에서 구체적인 진전은 없다. 뭘 보고 '진전'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보도했고, '아사히신문' 역시 "어떤 인식에서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는 정부 관계자의 반응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찌된 영문일까요?   우리 대통령의 인터뷰 내용과 상대국인 일본이 서로 엇박자를 보이고 있는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요.  이러한 의문으로부터 벗어나고팠던 청와대 출입기자들, 청와대에 우리말 회견 원문을 요구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청와대에선 그러한 전례가 없다며 이마저도 거절했다고 합니다.  내부 방침이라는 답만 되풀이하며 납득할 만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또 다시 신비주의 컨셉을 꺼내든 모양새입니다.  정부가 자신의 책무를 다하면서 그러한 컨셉을 고수한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습니다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기에 문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 외교 당국이 사단을 빚고 말았습니다.  일본의 역사 왜곡 표현을 주일 한국대사관의 홈페이지에 여과없이 게시하여 논란이 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해당 사안은 단순히 어제 오늘만의 문제가 아니기에 더욱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15일 세계일보의 단독보도가 나간 뒤 외교부가 뒤늦게 해당 게시물을 삭제하긴 했습니다만, 문제가 된 게시물은 지난 2007년 1월25일 작성된 것으로, 그동안 약 8년6개월 간 계속해서 게시됐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세계일보

 

참고로 해당 게시물의 한일관계 연표엔 을사조약이 을사보호조약으로, 안중근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이 암살로, 강제합병 내지 경술국치가 한일합방으로 표기돼 있었다고 합니다.  해당 문구들은 우리 정부가 과거 일본교과서 파동 당시 일본 정부에 시정을 요구했던 것으로 알려진 사안이라 더욱 뼈아프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박 대통령의 인터뷰 발언이 단순히 자신의 희망사항을 얘기한 것인지, 나름의 일본 정부 압박 용도로 꺼내든 것인지, 그도 아니면 실제로 드러나지 않은 물밑 접촉과 진전이 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본에 시정을 요구했던 일본의 역사 왜곡 표현을 8년이 넘도록 버젓이 대사관 홈페이지에 올려 놓은 채 언론 보도가 있기까지 이를 고스란히 방치한 외교 당국이기에 만약 일본과의 물밑 접촉이 실제로 이뤄지고 있다 해도, 과연 그에 따른 성과를 제대로 이끌어낼 만한 능력이 있기나 한 것인지 의문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밀주의 컨셉이 오늘날의 메르스 사태를 더욱 키우고 있듯 대통령의 인터뷰 내용을 공개하지 않고 있는 또 다른 비밀주의는 더 많은 의구심을 불러올 수밖에 없습니다.  불통도 불통 나름입니다.  국익이나 국민의 생명과 관련한 사안에 대한 불통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대통령은 인기 아이돌이 아닙니다.  한 국가의 지도자입니다.  국민이 알아야 할 마땅한 것들에 대해 마치 인기 연예인들이 흔히 써먹곤 하는 신비주의 컨셉으로 일관해선 안 될 노릇입니다.  대통령의 이번 인터뷰가 단순히 일본을 압박하기 위한 제스쳐였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습니다만,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빌미로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무리수가 행해지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 심히 우려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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