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스파이> 편견에 갇힌 '나'를 돌아보게 한 영화

새 날 2015. 5. 31.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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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들리 파인(주 드로)은 자칭 타칭 최고의 스파이 요원이다.  외모도 훤칠한 데다 특히 몸동작만큼은 더욱 일품이다.  수트를 쫙 빼입은 그의 모습은 흠잡을 데라곤 단 한 군데도 없을 정도로 멋진 아우라를 뿜어낸다.  이러한 그가 현장에 투입되어 목숨을 건 위험천만한 미션을 수행할 때면 사무실에 앉아 원격으로 그를 그림자처럼 도와주는 요원 하나가 있었다.  다름아닌 수잔 쿠퍼(멜리사 맥카티)라 불리는 묘령의 여성이었다. 

 

 

어느날 핵무기 밀거래를 시도하려는 집단의 거처에 잠입하여 이를 막으려던 작전이 적들에 의해 들통이 나는 바람에 현장에서 이를 수행 중이던 브래들리 파인이 그만 목숨을 잃고 만다.  해당 작전을 총 지휘했던 CIA는 당혹감에 빠져든다.  스파이 요원에 대한 정보가 적진에 이미 모두 유출됐으리라 짐작되는 긴박한 상황, 제아무리 유능한 요원이라 한들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처지가 돼버렸다.  

 

 

그런데 내근 요원으로 근무하며 스파이와는 도무지 어울릴 법하지 않던 수잔 쿠퍼가, 현장에서 작전 중 사망한 브래들리 파인의 억울함을 달랠 요량으로 현장에 투입된 채 비밀 작전을 수행해야 할 스파이 요원에 자원하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이 대목에서 잠깐, 그녀가 스파이와는 도무지 어울릴 법하지 않다는 표현은 순전히 나의 편견으로부터 비롯됐다.  잘못된 표현임이 분명하다.  그 누가 됐든 사람을 절대로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 될 노릇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뇌리 속엔 스파이 하면 왠지 특수한 능력과 수려한 외모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선입견 내지 고정관념이 이미 굳게 자리를 잡고 있던 터다. 

 

 

왜 아니겠는가.  최근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스파이 영화 '킹스맨'만 해도 멋진 수트와 빼어난 외모는 스파이의 필요충분 조건 아니었던가.  수잔 쿠퍼는 사실 영화나 TV 속에서 흔히 등장하던 스파이와는 그 모양새부터 남다르다.  걸어다니는 일조차 버거우리 만큼 넉넉한 체형을 지닌 탓이다.  그 때문인지 예리한 구석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가 없으며, 순발력 또한 많이 떨어진다.  패션 감각도 엉성하기 짝이 없다.  마치 예전 만화 속 구영탄이나 영화 속 영구처럼 허허실실(?) 형태의 외양을 제대로 갖췄다.  

 

또 다른 정통 스파이 요원 릭 포드(제이슨 스타뎀)가 자신의 직위를 내려놓을 만큼 자존심 상해하며 반대하는 사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잔 쿠퍼가 결국 스파이 요원으로 낙점된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생각하던 전형적인 스파이와는 전혀 딴판인 외모가 한 몫 단단히하게 된다.  휴대용 핵폭탄이 마피아 집단에게 넘어가게 될 경우 치명적인 위험에 빠질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기존 스파이와는 전혀 다른 형태로 분한 수잔 쿠퍼는 과연 이러한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풀어낼까?

 

 

코미디 장르에 속하는 탓에 시종일관 우스꽝스럽게 다가오는 스토리와 영상이지만, 우리의 편견을 깨는 수잔 쿠퍼의 활약상은 기존의 스파이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스파이 상을 창조하고도 남을 만큼 부족함이라곤 전혀 없다.  박쥐와 쥐가 들끓는 지하에서 모니터에 의지한 채 현장 요원들을 보조해오던 그녀, 실은 늘 진정한 스파이 상을 꿈꾸며 한없이 동경해 마지않아 오던 터다.  자신의 비참한 처지의 대부분은 외모 콤플렉스로 대변된다.  아니 그녀가 콤플렉스를 지니게 된 건 순전히 주변 상황 탓이다. 

 

완벽한 외모를 지닌 동료가 늘 자신만만해하며 어느 장소에 가나 환영 받은 채 승승장구하는 모습과 그렇지 못한 자신의 초라함이 대비되는 장면을 통해 외모에 의한 편견과 차별이 얼마나 치명적인 것인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우습게 묘사됐지만 그 만큼 개인이 속으로 삭이는 아픔은 배가 될 수도 있는 사안이다.  사실 CIA의 신입 요원으로 발탁될 당시만 해도 그녀의 실력은 누구보다 출중했다.  사격이면 사격, 격투기면 격투기, 못하는 게 없던 그녀였으니, 사회적 편견은 그동안 진짜 실력자를 철저하게 외면해오며 희생양 삼아왔던 셈이다. 



수잔 쿠퍼식 스파이, '007 시리즈' 등 기존 형태의 스파이 내지 '킹스맨'에서의 개성 강한 그것과는 또 다른 면모를 지닌, 전혀 새로운 스타일의 스파이가 탄생했다고 봐도 무방할 듯싶다.  아니 새로운 스타일이라기 보다 실은 우리 눈에 덧씌워진 편견이라는 꺼풀을 한 단계 벗겨냈다고 해야 함이 맞을 것 같다.  물론 그녀의 몸 동작 하나하나, 그리고 옷 맵시는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하지만 엉성함 속에서 빛을 발하는 결정적인 동작들은 여지없는 스파이적 속성, 바로 그것이었다.  스파이로서의 직분에 대한 부족함은 전혀 없다.  

 

 

늘 살벌한 액션 연기만을 선보였던 제이슨 스타뎀은 입만 살아있는 허세 작렬 허당 스파이로 분한 채 멜리사 맥카티와 육두문자를 앞세운 입담 전쟁을 벌인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통용될 법한 최신 유행어들이 난무하며 세련된 어투로 뿌려지는 자막은 영화에 세련미를 덧입히는 역할을 톡톡히한다.  무언가 색다르게 와닿았던 그 느낌은 또 다른 이들의 정성이 깃든 탓이다.  케이블채널 tvN의 SNL코리아 작가진이 자막 번역 작업에 합류했노라는 팜플릿 속 글귀를 나중에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영화, 짜릿한 액션 장면으로 희열을 느끼게 해주기 보다, 오히려 수잔 쿠퍼가 쏟아내는 속사포 같은 입심과 드립이 마치 편견으로 가득찬 나 자신과 우리 사회를 향해 내뱉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탓에 충분한 대리 만족감을 얻게 해준다.  다른 한 편으로는 출중한 실력을 갖춰음에도 불구하고 외모라는 사회적 편견에 갇힌 채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 못하는 수많은 이들에게 또 다른 판타지가 되어주는 작품이 아닐까도 싶다.

 

 

감독  폴 페이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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