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외교부장관의 자화자찬이 우려스러운 까닭

새 날 2015. 4. 1.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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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를 둘러싼 한일 간의 치열한 외교전이 현재 유네스코(UNESCO)에서 펼쳐지고 있다.  2013년 일본이 신청한 메이지시대 산업혁명 유산 28곳에 대해 유네스코 전문가 자문기구의 심사 결과 등재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진 탓이다.  이번에 등재될 가능성이 높은 11곳 중 나가사키 현 하시마의 경우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들이 탄광에 강제 징용된 채 가혹한 노동 및 학대에 시달려 ‘지옥섬’이라 불리던 곳이며, 나가사키 조선소(미쓰비시중공업) 역시 태평양전쟁 당시 전투함과 어뢰 등을 생산하던 전초기지로 알려진 곳이다.

 

이번 문화유산 등재 추진 과정은 일본 아베 총리의 강력한 의지에 의해 2013년 9월부터 일본 정부의 치밀한 계획 하에 유네스코 본부 관계자들을 설득하여 이뤄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에 반해 우리는 유네스코가 당시 우리의 입장을 고려해 신중하게 판단할 것이라는 한 마디에 거의 손을 놓고 있다시피 하다가 근래 유네스코 등재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지면서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느라 여념이 없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결정되는 6월 총회까지는 불과 석달도 채 남지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더욱 문제가 되는 건 파리 유네스코 한국대표부 수장들이 현재 공석이라는 사실이다.  대사는 최근 사직한 바 있고 공사도 지난달 말 귀임했단다.  화들짝 놀란 정부는 뒤늦게 외교장관 특보를 급파해야만 했다.

 

ⓒ뉴시스

 

일본은 유네스코에서 상당한 외교력을 행사하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일례로 유네스코 예산 분담금이 2014년 기준 전체 2위로써 막강한 돈줄을 쥐고 있는 상황이다.  아울러 동양인 최초의 사무총장이었던 고이치로의 10년 집권으로 네트워크마저 꽤나 탄탄하단다.  21개 국가로 이뤄진 총회에서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의 결과 도출이 상당히 버거울 것이라 예측되는 대목이다.  우리 측은 그동안 거의 무대책으로 일관해오다 최근 분위기가 일본 쪽으로 급선회하자 뒤늦게 대책 마련에 나선 상황이다.  가뜩이나 일본에 비해 모든 여건에서 열세인데, 그야말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병세 외교부장관은 외교부의 최근 현안 대응에 대해 '고난도 외교력'을 선보인 것이라며 자화자찬에 빠진 채 허우적대고 있다.  지난달 30일 외교부 청사에서 열린 재외공관장회의 개회사에서 윤장관은 "아시아와 아태 지역은 부상하는 중국과 부활하는 미국을 모두 수용할 만큼 넓다.  현재 한국은 우리의 전략적 가치를 통해 미국과 중국 양측으로부터 러브콜을 받는 상황이다.  딜레마가 아니라 축복이다.  미국의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와 중국 주도의 AIIB(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가입 결정은 바로 이러한 고난도 외교력이 발휘된 대표적 사례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는 G2인 미국과 중국의 치열한 외교전이 한반도 주변에서 펼쳐지고 있는 살벌한 상황에서 AIIB 가입 결정을 두고 마치 우리의 외교적 역량 덕분에 이뤄낸 성과인 양 자아도취에 빠진 모양새가 아닐 수 없다.  AIIB 가입이 과연 우리의 주도적인 외교력의 산물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  대충 밑그림이 그려지고 있는 사드 도입 문제 역시 최종 결정이 이뤄질 때 비슷한 이유 때문이라고 우길 텐가?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으며, 여전히 중요하다.  세계 열강들이 각축전을 벌이는 상황 역시 매 한 가지이다.  때문에 난 비록 1,2차 방정식 수준의 지극히 낮은 이해력을 갖춘 국민의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작금의 상황이 '샌드위치'라거나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라는 사실 정도는 대충 숙지하고 있다.  물론 자국의 이익을 위한 외교전 사이에 끼인 우리더러 미국과 중국 양측으로부터 러브콜을 받거나 축복받는 상황이라는 표현과 19세기 또는 냉전적 사고방식의 패배주의적 자기비하적 시각에서 역량과 잠재력을 외면하고 있다는 윤장관의 표현으로부터는 일견 바람직해 보이는 구석이 엿보인다.  어쩌면 예로부터 외적의 침입과 식민 지배에 너무도 익숙해져버린 우리에겐 긍정적인 시각보다 부정적인 사고방식이 대뇌 체계를 지배해 온 경향이 클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다시금 직시해볼 땐 윤장관의 시각은 그와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무리 긍정적인 사고방식이 옳다 하더라도 현실마저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일 테니 말이다.  우리는 현재 미국과 중국 양쪽에서의 러브콜을 받는, 축복 받은 상황이 결코 아니다.  실은 미국과 중국 양 국가 중 어디에 보다 중점을 둬야 할지, 국익에 따른 국가 전략의 선택과 결정이 절실한, 엄중한 시점에 놓여 있다. 

 

국익을 가장 우선시 하겠다던 윤장관은 AIIB 가입 결정을 두고 마치 국민은 1,2차 방정식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미개한 수준이고, 그에 반해 자신들은 고차 방정식을 해결한, '고난도 외교력'을 선보인 수훈 갑이라며 스스로를 띄우기에 정신이 없는 것 같다.  그 사이 일본은 조선인 강제 징용의 한이 서린 시설물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키기 위해 막강한 외교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외교부 수장이 자뻑에 빠진 사이 과거사를 둘러싼 한일 외교전에서의 완패가 현실화되는 게 아닐까 싶어 난 벌써부터 우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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