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상의원> 트라우마가 빚은 마구 얽힌 실타래

새 날 2015. 3. 22.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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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팅엔 스포일러가 포함됐을 수 있으니 읽는 분의 주의를 요하는 바다.  지울 수 없는 유년기의 상처 때문에 빚어질지도 모를, 어떤 사람의 비뚤어진 사고와 행동은 가까운 미래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까?  만약 그가 한 국가를 소유한 왕이라면?  모든 사건의 단초는 그렇게 시작됐다.  결국 왕 때문이다.  물론 절대 군주정치와 계급제도가 토대를 이루는 시대적 배경이 그의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될 테지만, 어쨌거나 선왕이었던 형의 죽음 덕분에 왕의 자리에 오른 현 임금(유연석)만의 특별했던 성장 배경과 그로부터 비롯됐음직한 트라우마가 오늘날의 결과를 빚은 셈이다.

 

새로 직위한 왕의 과거 트라우마는 쇠고기 한 점으로 요약된다.  어린 시절 두 형제 중 일찌감치 왕위를 예약 받은 형은 자신의 권력을 암암리에 동생에게 과시하는 만용을 부려왔다.  어느 날이다.  동생이 쇠고기를 먹고 싶다 하여 차려진 밥상이었지만, 형은 자신의 권위를 동생에게 각인시키려는 용도로 이를 활용하고 만다.  즉 동생이 먹지 못하도록 구운 고기를 죄다 씹어 뱉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멀쩡했던 고기는 단 한 점, 물론 이는 지극히 의도된 연출이었으며 천연덕스레 이를 동생에게 권하던 형이다. 

 

동생의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동생에게는 마음에 두던 처자(박신혜) 하나가 있었는데, 형이 자신의 여자를 간택하던 날 그녀를 마치 쇠고기 한 점마냥 자신의 권력 과시용 도구로 삼으며 동생에게 보란 듯 넘긴다.  그녀를 좋아하던 동생의 감정은 그날 이후 싸늘하게 식고 만다.  왕이 된 후에도 그녀에게 좀처럼 다가갈 수 없던 이유이다.  모든 고통과 얽힌 실타래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결과는 이로부터 비롯됐다.

 

상의원을 이끌던 어침장 조돌석(한석규)에게선 속물적 근성과 소시민적 면모가 물씬 풍긴다.  당시 펄럭이는 소매자락과 챙 넓은 갓은 양반들만의 자존심이었다.  다소 우스꽝스런 일이지만 양반이라는 체통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일상 생활에서의 불편함 정도는 기꺼이 감내할 수 있던 그들이다.  조돌석의 속내는, 양반이 되는 그날을 위해 넒은 소매자락과 챙 넓은 갓을 미리 준비해 둔 채 예행연습을 하던 장면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기방에서 기생들의 의복을 만들거나 수선해주며 살아가는 이공진(고수), 그는 조돌석과는 상반된 성향을 지닌 인물이다.  몸이 자유로운 만큼 생각 또한 어느 누구보다 자유분방하여 가식이나 형식 따위의 얽매임이 전혀 없다.  때문에 그가 만든 옷은 조돌석 등이 만들어내는 틀에 박힌 뻔한 디자인의 옷들과는 사뭇 달랐다.  의복 제작에 관한 한 가히 천재라 할 만큼 뛰어난 재능을 갖춘 그다.  가까운 훗날 이공진, 조돌석 두 사람 간 갈등이 점쳐지는 상황이다.

 

어느 날 이공진이 궁궐로부터 부름을 받는다.  왕의 헤진 면복 수선이 목적이었던 이공진과 중전의 만남은 그렇게 이뤄졌다.  이공진의 천재적인 의복 제작 능력은 이를 기화로 왕의 마음을 훔치는 데 성공하게 된다.  뿐만 아니다.  중전에게 첫눈에 반해 이내 그녀에게 빠져든 이공진의 발칙하거나 무언가 고정관념의 틀을 깨는 듯한 행동 덕분에 중전의 마음마저 흔들리게 된다.  이공진의 탁월한 바느질 실력은 중전과 함께하는 시간을 늘리지만, 그만큼 주변 상황은 점차 그를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 속으로 몰아간다. 



왕은 권력이라는 속성에 의해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가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터라 의식적으로 중전을 멀리해 왔는데, 왕 주변의 간신배들은 이러한 그를 교묘히 역이용하는 상황이다.  왕의 마음을 훔쳐 중전을 쫓아낸 뒤 국가 전체를 흔들려 접근한 한 간신배의 여식 소의(이유비)는 중전과 이공진의 궁궐내 악소문을 놓칠 리가 없다.  어침장인 조돌석 역시 빼어난 실력을 통해 자신의 자리마저 위태롭게 하고 있는 이공진의 행위를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이공진을 향한 왕의 질투와 조돌석의 그것은 그 성질이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합쳐지자마자 상승효과를 일으키며 서슬퍼런 날이 되어 돌아온다.  비겁하다고 외치는 중전의 외마디는 속절없이 허공에 흩뿌려질 뿐이다.

 

제짝을 찾지 못해 서로 어긋나기만 한 사랑 또한 가슴 저미게 다가온다.  기방의 월향(신소율)이 금기를 깨려는 이공진의 행동에 제약을 가한 것은 그에 대한 애정의 깊이를 짐작케 하는 장치이다.  하지만 이공진의 마음은 진작부터 중전에게로 향해 있었다.  결국 짝사랑이었던 셈이다.  중전의 마음은 애초 왕 한 사람만을 향해 있었으나 거리를 둬 오던 왕의 행보 때문에 지쳐가던 찰나였고, 그 때 홀연히 나타난 이공진이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주변 여건과 신분의 벽 때문에 결코 이뤄질 수 없는 금기된 사랑이었지만 말이다.

 

이 영화의 대표 장면을 꼽으라 한다면 난 천연염료로 만들어진, 하늘빛을 쏙 빼닮은 아름다운 색상의 하늘거리는 천을 배경으로 조돌석과 이공진이 함께 앉아 바람을 느끼는 장면을 꼽고 싶다.  전통 의상인 우리 한복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화려하면서도 고운 색상의 다양한 디자인이 선보여질 때마다 나의 눈은 호사를 누리는 느낌이다. 

 

주어진 틀 안에선 최고였지만 결코 그로부터 한 발자욱도 벗어날 수 없었던 경직된 조돌석, 창의력 대장 이공진이 조돌석의 양반되는 날을 위해 만들어놓은 의복을 보며 그의 마음 씀씀이를 느낀 탓인지 하염없이 눈물 흘리는 장면과 중전으로부터 이공진을 거쳤다 다시 중전의 손에 들리게 된 황금비녀를 꽂은 채 제비꽃이 수놓아진 이공진이 남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중전의 모습은 모든 상황을 한 장면으로 압축시켜 놓은 느낌이다. 

 

이 영화는 사극에 현대적인 감각을 덧입힌, 일종의 퓨전 형태라 흡인력 있게 다가온다.  탄탄한 스토리를 배경으로 전통의 멋을 한껏 살려낸 데다, 그 안엔 애절한 사랑과 권력 및 인간의 속성까지 담겨있어 더욱 흥미로웠다.  재미있기도 했지만, 정말 잘 만들어진 작품이다.

 

 

감독  이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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