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저냥

우리 부부, '덤앤더머' 된 사연

새 날 2015. 1. 26.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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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소화기관 이상으로 음식 섭취에 관한 한 최대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입장이다.  여러모로 불편이 따르는 일이긴 하다.  우선 알콜 종류는 아예 입에 대지 않고 있을 뿐더러 그 좋아하던 커피마저 멀리하게 됐으니 말이다.  일상에도 작은 변화가 생겼다.  커피 대신 유자차나 모과차 그리고 녹차 등의 과실차를 즐겨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해당 차들이 금방 동이 났다.  이 늦은 겨울밤, 아내와 나란히 앉아 함께 마시는 차 한 잔의 여유가 나름 생활의 활력소이자 즐거움으로 와닿던 찰나 차가 모두 떨어졌으니 당장 어디가서 사오기도 곤란한 상황에서 이를 어찌하나 싶었다.  그때였다.  예전에 사놓고 그냥 보관만 해오던 보리차 티백이 언뜻 떠올랐다.  아내에게 물었다. 

 

"보리차로 차 분위기를 내는 건 어떨까?"

 

"왜 안 되겠어"

 

이렇게 해서 우린 보리차를 우려내 차 대용으로 삼았다.  그런데 평소 음용수로만 여겨왔던 보리차도 꽤나 그럴듯한 차로 변모가 가능했다.  틈이 날 때마다 우리 부부는 뜨거워 김이 모락모락 나는 향긋한 보리차를 나란히 놓고 과자 부스러기를 먹어가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예전 같았으면 하찮거나 보잘 것 없어 보이던 이러한 소소한 일상이 근래 들어 왜 이리 행복하고 달달하게 와닿는 건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감이 잡히는 부분이 있긴 하다.  아무래도 한 살 더 먹은 탓이 클 것 같다.  지난해 미국 ABC뉴스에 보도됐던, 나이가 들수록 행복해지는 이유에 대한 내용이 문득 떠오른다.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한 심리학자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젊은이들의 경우 사랑에 빠지거나 첫 차를 사고, 처음으로 얻은 자녀의 작은 손가락을 지켜보는 것 등 ‘특별한 경험’을 통해 행복을 느끼지만, 노인들은 특별한 경험뿐 아니라 하던 일을 멈추고 단지 길가의 장미 향기를 맡는, ‘평범한 일상’을 통해 기쁨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내가 노인이 다 됐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어쨌거나 아이들도 어느 정도 성장했고, 이제 점차 우리 부부의 삶을 찾아가고 있던 시점인 만큼 젊었을 당시 정신 없어 그랬거나 아니면 관심이 없어 그냥 지나쳤던 소소한 부분들이 이젠 꽤나 의미있게 다가오는 것이다.  보리차를 차로 받아들일 만큼의 여유와 너그러움은 어쩌면 시간의 흐름이 선사해 준 작은 선물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난 내친 김에 사무실에서도 커피 대신 보리차를 먹기로 작정했다.  내일 아침 이를 챙겨 가겠노라고 아내에게 말했다.  물론 나이 듦의 공통현상, 건망증이 내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때문에 혹시 잊을지 모르니 아침이 되면 내게 꼭 보리차에 대해 귀띔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랬더니 아내로부터 돌아온 말,

 

"당신이 한 말을 잊어버릴지 모르니 까먹지 말라고 내일 다시 한 번 내게 얘기해 줘요."

 

헐..  이건 뭐 덤앤더머 부부가 따로 없군...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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