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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접 경험의 즐거움 539

당신은 훨씬 좋은 사람일지 모른다 '디어 랄프 로렌'

종수는 미국 유학 중인 청년이다. 대학원에서 연구 과정을 밟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비록 완곡하게 표현하긴 했으나 지도교수가 그에게 퇴출을 선언한 것이다. 종수는 이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괴로웠다. 자괴감에 빠져든 그는 연일 술을 퍼부으며 스스로를 혹사시킨다. 세상과의 단절을 시도한 것이다. 도망치듯 브루클린으로 거처를 옮긴다. 의욕을 잃은 데다 목적의식마저 놓아버린 그, 서랍을 열다가 문득 잊고 지내온 수년 전 누군가가 자신에게 보내온 청첩장 한 장을 발견하게 된다. 10년 전 한국에서의 학창 시절이 그의 머릿속을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그러니까 청첩장을 보내온 당사자 수영이와의 아스라한 기억을 소환하게 된 것이다. 수영이는 의류회사 대표인 랄프 로렌에게 해당 ..

맥락과 통찰력이 요구되는 시대 '미래를 읽는 기술'

기술의 발전 속도가 너무 빨라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시대다.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지식이나 다룰 수 있는 기술의 능력은 산술급수적이라 그 한계가 너무도 뚜렷한 데 반해, 기술의 진보 속도는 기하급수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데다가 한계 또한 전혀 느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미래학자들이 작금의 시대를 기하급수시대라 지칭하는 데는 바로 이러한 배경이 뒷받침한다. 덕분에 흔히 4차산업혁명이라 불리는 앞으로의 미래 모습은 더욱 불투명하기 짝이 없다. 독서 큐레이터 이동우가 쓴 '미래를 읽는 기술'은 이렇듯 혼란스러운 시대 상황과 곧 마주하게 될 우리가 과연 어떻게 미래를 받아들일 것이며, 이를 어떤 방식으로 적절하게 준비할 것인지 등 다양한 영역에 포진돼 있는 전 세계 석학들의 저서 42권을 직접 분석한..

과거의 질곡으로 빚어낸 현재 '기억해줘'

"한때는 그랬지. 하지만 이젠 아냐. 스무 살이 넘어서 독립하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부모 탓을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 삶을 오롯이 자신의 사랑으로만 채워가던 엄마를 끝없이 원망하기만 하던 안나, 해인이 "아직도 엄마를 원망하느냐"며 던진 질문에 불쑥 내놓은 답변이다.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누구나 과거의 사건, 부모의 양육방식, 성장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으나, 자신에게는 문제가 전혀 없다고 믿고 싶어하는 경향성 때문에 문제의 원인이 과거에만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시선을 과거가 아닌 미래로 향해야 한다." 그러니까 안나의 답변과 아들러의 주장은 궤를 같이하고 있는 셈이다. 아들러의 철학이 내 마음에 쏙 들어왔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렇듯 우리의 삶이 마치 운명..

손예진의 당찬 연기가 돋보이는 영화 '협상'

서울경찰청 위기대응팀에서 근무하는 하채윤(손예진) 경위, 이날은 휴가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가정집에서 벌어진 인질 사건으로 인해 협상가의 신분으로 현장에 급파된다. 라포 형성을 위해 인질범에게 조금 더 가까이 접근하면서 접촉을 시도하려던 그녀, 하지만 경찰 특공대의 배후 움직임을 간파한 인질범들이 순간 흥분을 이겨내지 못하면서 현장은 아수라장으로 돌변하였고, 안타깝게도 인질들은 모두 살해되고 만다. 협상 분야에서 만큼은 어느 누구보다 전문가로서 인정을 받고 있던 그녀였으나, 자신의 역량을 벗어나는 비슷한 사건이 하나둘 쌓여갈 때마다 하채윤은 죄책감과 자괴감으로 인해 몸둘 바를 몰라해한다. 특히 이번 사건은 유독 그녀의 내면 깊숙이 파고들면서 극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겼다. 그러던 어느 날 하채윤의 ..

장르 넘나드는 놀라운 변주 '그대 눈동자에 건배'

일본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흔히 흡인력이 강하다고들 한다. 일본 독자들의 경우 책을 한 번 펼쳐들면 단숨에 다 읽게 된다며 그의 작품에 매료된 이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의 소설을 비록 몇 권 접하지 못했으나, 이제껏 읽은 작품들을 기준으로 볼 때 그가 정성껏 창작해내고 꾸며낸 이야기들 가운데 우리 정서와 어긋나는 지점이 제법 있는 듯싶다. 짐작컨대 책을 읽으면서 자꾸만 몰입감을 떨어뜨리게 했던 요소도 다름 아닌 그런 류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어쨌든 무려 9편의 단편소설이 한꺼번에 실린 이 소설집은 솔직히 작가의 매력에 도취된 일본인들만큼 단숨에 읽어 내려가기란 쉽지 않다. 며칠에 걸쳐 차근차근 읽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집중력이 다소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양..

안에서는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바깥은 여름'

어느 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가 유치원 차량 사고로 숨지고 만다. 젊은 부부의 상실감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어쨌거나 시간은 약이 되었던 듯싶다. 그동안 감히 입밖으로 꺼낼 수 없었던 보상금 명목으로 받은 보험금에 대해 이의 용처를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연히 아이가 남긴 흔적을 발견하게 된 부부는 또 다시 죽은 아이 생각에 오열하게 된다. 주변 사람들은 젊은 부부가 겪는 아픔에 대해 남의 일처럼 여기지 않고 탄식과 안타까움을 표시해왔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이도 변모하기 시작한다. 흡사 전염병이라도 되는 양 자신들마저 불행에 감염될까 봐 전전긍긍, 모두들 부부를 피하거나 뒤에서 수군거렸다. 작가의 표현을 잠깐 빌리자면 내가 이만큼 울어주었으니 너는 이제 ..

80개의 봄 75개의 봄을 겪은 이들의 성장담 '두 늙은 여자'

문명으로부터 동떨어진 알래스카 유목민들에게 이번 겨울은 지나치게 혹독할 것으로 예상된다. 겨울철을 앞둔 늦가을임에도 벌써부터 매서운 추위가 느껴지는 까닭에 그동안 이들의 주 식량원이 돼주었던 사슴이 아예 종적을 감췄고, 그렇다고 하여 다람쥐 따위의 작은 동물들을 잡아 부족 전체의 끼니를 해결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거친 땅 위에서 생존하기 위해 이들에게 나약함이란 결코 용인되지 않는 삶의 태도다.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족장은 결국 부족 전체를 위해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했다. 다름 아닌 나이가 많아 생산성이 떨어지고 이동하는 데 방해가 되는 두 명의 연장자를 이번 무리 이동에서 배제시키기로 한 것이다. 80살의 칙디아크와 75살의 사가 당첨됐다. 사에게는 피붙이가 아무도 없었으나 칙디아크에게는 딸과 ..

둔감력 발휘가 절실한 시대 '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다'

머릿속에서 문득 작금의 기술 발전 속도를 떠올려본다.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다. 이를 따라가는 일이 무의미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저 적응하는 일만으로도 벅차니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일까? '기하급수 시대가 온다'의 공동 저자 살림 이스마일은 이러한 시대를 이른바 기하급수시대라 지칭한다. 인간의 능력은 산술급수적인 데 반해 세상은 이미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는 현상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매우 적확한 표현이라 생각된다. 2007년 스마트폰이 첫선을 보인 이래 실제로 우리가 사는 세상의 변화엔 엄청난 가속도가 붙고 있다. 인텔 및 페어차일드 반도체의 창립자인 고든 무어는 1965년 기고를 통해 향후 최소 10년간 마이크로칩의 성능이 매 1년마..

부채의식 일깨우는 5월 광주 '소년이 온다'

동호는 15세에 불과한 중학생 소년이다. 그런 그의 운명을 가른 건 1980년 5월 눈부시게 푸르던 어느 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청 광장에는 벌써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 군인들의 만행과 계엄 철폐를 부르짖고 있었다. 그맘때 아이들의 성향이 그러하듯이 동호와 정대는 인파를 뚫고 선두 방향을 향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계엄군이 시민들을 향해 총을 난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많은 시민들이 총탄에 맞아 고꾸라졌다. 정대도 옆구리에 총탄을 맞은 채 붉은 선혈을 길 위에 쏟아내고 있었다. 동호는 쓰러진 정대에게 어떻게든 접근하려 시도했으나 사람의 기척만 있으면 귀신 같이 이를 알아채고 어디선가 총탄이 날아들었다. 건물 곳곳에 저격수가 숨어 있었던 탓이다. 결국 동호는 정대에게 가지 못했다..

강요된 잣대, 남자다움에서 벗어나자 '맨박스'

요즘처럼 커뮤니티에서 조금이라도 여성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내거나 페미니즘의 '페'자만 등장해도 남성들이 게거품을 물듯이 덤벼든 적도 없었던 것 같다. 이상하게 여성의 권리 얘기만 나오면 남성들이 쉽게 이성을 잃곤 한다. 그러면서도 헐벗은 여성의 이미지나 걸그룹 멤버의 사진 게시물이 '후방주의'라는 말머리와 함께 올라올 때면 그와 반대로 너 나 할 것 없이 품평 행위에 빠져든 채 침을 질질 흘리면서 정신줄을 놓거나 환호성 일색이 아닌가. 이러한 현상은 도대체 왜 발생하는 걸까? 이를 명쾌하게 설명해주는 책 한 권이 있다. 미국의 사회운동가인 토니 포터가 쓴 책 '맨박스'다. 저자가 여성이라면 혹시라도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못하는 이가 존재할지도 모를 일이지만, 다행히 남성이다. 그렇다면 남성이 남성을 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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