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르의 전설

한 줄기 바람이 된 걸까?

새 날 2017. 8. 14.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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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부쩍 가까워진 느낌이다. 아침 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하늘이 잔뜩 찌푸린 상태다. 아침 일찍 정원으로 나가 한결 시원해진 바람을 온몸으로 맞이한다. 상쾌하다. 아침을 남들보다 조금 일찍 맞이할 요량으로 대문부터 활짝 열어놓는다. 어디선가 제법 강한 바람 한 줄기가 대문 안으로 들어온다. 그런데 이 바람이란 녀석이 고양이 한 마리까지 집안으로 냉큼 들여놓는 게 아닌가. 


진한 밤색에 검은색 줄무늬가 그려져 있는 고양이였다. 갑작스런 녀석의 출현에 난 그만 깜짝 놀라고 만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자면,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녀석과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내가 화들짝 놀란 탓인지 녀석의 동그란 눈이 더욱 커지더니 흠칫하는 모양새다. 그 때다. 난 그저 녀석의 눈을 쳐다보았을 뿐인데, 일순간 미르의 모습이 녀석 위로 오버랩되는 게 아닌가.



비가 내린다. 미르가 떠나던 그날은 비가 이보다 훨씬 많이 왔다. 내 마음속 영원한 우상 '산울림'의 11집 앨범에 실린 '그대 떠나는 날 비가 오는가'를 이제는 왠지 들을 수 없을 것만 같다. 비가 내리는 날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미르 생각이 더욱 간절해질 것 같기 때문이다. 산책로를 걷다가 미르와 같은 품종인 말라뮤트나 비록 다른 품종이긴 하나 비슷한 모양새의 허스키 류를 만나게 되면 예전에는 마냥 반가웠는데, 이젠 이들을 의식적으로 피하게 된다. 미르의 그 선하고 큼지막한 눈이 자꾸만 떠오르기 때문이다. 


길고양이로부터 미르의 흔적을 느끼게 되다니 녀석을 향한 내 애틋한 마음이 아직까지 정리가 되지 않았음이 확실하다. 호기심 가득하면서도 전혀 적의를 띠지 않은 듯한 고양이의 그 동그란 눈은 필시 미르의 그것을 빼닮았다. 먹거리를 찾기 위해 우리집까지 흘러들어온 모양이다. 그도 아니라면 이제는 한 줄기 바람이 된 미르가 녀석을 내게 인도한 게 아닐까? 고양이는 사람의 손을 많이 탄 탓인지 나에 대한 경계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장맛비가 내리던 7월 어느 날 새벽의 일이다. 난 깊은 잠에 빠져 전혀 눈치를 챌 수 없었는데, 당시 길고양이 울음소리가 요란했던 모양이다. 단잠에 깊이 빠진 사람을 깨울 만큼 말이다. 녀석들을 쫓아낼 요량으로 그 야심한 시각에 어머니께서 대문을 열고 소리가 나던 곳으로 향하신 것이다. 현관문 앞에서 휴식을 취하던 미르에게는 오로지 활짝 열린 대문만이 눈에 들어오던 찰나다. 본능에 충실한 미르는 그날따라 유독 자연 속으로 돌아가고 싶었던지 앞뒤 정황 가리지 않고 오롯이 앞만 바라보며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결국 미르가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게 된 배경에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알 수는 없으나 어쨌든 고양이가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그동안 고양이가 내게 접근해왔던 경험은 전무하다. 그게 집고양이든 길고양이든 말이다. 나를 깜짝 놀래키고 녀석 스스로도 놀랐던 그 고양이는 신기하게도 나를 겁내거나 무서워하지 않는 눈치다. 아마도 그 때문이었던 듯싶다. 녀석의 눈을 보며 순간 미르가 떠올랐던 건.. 


결과적으로 볼 때 고양이로 인해 우리 미르가 운명을 달리하긴 했으나, 이는 내 의식의 흐름에 갇혀 있던 사안이 아니며, 평소 겪을 수 없었던 진기한 경험임이 분명하다.



더위가 너무 심해 여름 내내 대문을 열어놓은 채 지내고 있다. 며칠 전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짐작되는 꼬마 녀석이 열린 대문 안을 기웃거리는 게 아닌가. 다음날에도, 또 다음날에도 비슷한 일은 자꾸만 벌어졌다. 이번엔 적어도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이였는데, 마찬가지로 열린 대문 안을 기웃거린다. 그 아이의 뒤를 쫓아오던 부모가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이 집에 큰 개 있었는데...'


꼬마도 그랬고, 아이도 그랬고, 미르에게 일어난 일을 전혀 알 길 없는 사람들이 우리 미르를 보기 위해 여전히 대문 주변을 기웃거린다. 우리 미르는 내 마음만 훔쳐간 게 아니었다. 주변에 사는 많은 아이들과 어른들의 마음 속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던 셈이다. 지난 해 병충해 때문에 예년과 달리 감나무의 상태가 상당히 좋지 않았는데, 올해는 꽤 좋다. 열매도 많이 달렸고, 무엇보다 실한 게 마음에 든다. 미르 녀석이 그토록 좋아하던 감이건만, 올해부터는 녀석과 함께할 수 없어 너무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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