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고단한 현실 투영된 신조어 '호모인턴스'

새 날 2017. 3. 18.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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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노동시간은 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이지만, 생산성은 선진국의 절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OECD가 지난 17일 발표한 구조개혁 평가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짧은 기간에 1인당 국내총생산(GDP)을 끌어올렸으나, 노동시간은 회원국 중 가장 길고 생산성은 최고 선진국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고 지적했다. 사회 구성원 다수가 저녁이 있는 삶을 꿈꿀 정도로 평소 일에 매달리는 시간은 많은데 반해 생산성은 크게 떨어지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다.


그러나 취업이라는 사회 진입의 첫 관문 앞에서 계속 고배를 마셔야 하는 다수의 취업준비생들의 입장에서는 그래도 앞서의 열악한 노동 환경이라도 좋으니 일단 취업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절실할 테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지난달 실업자 수가 135만 명에 달한 가운데 학원 등을 다니지 않으며 구직활동을 하는 ‘나홀로 취업준비생’이 40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집계됐다. 취업준비 인구가 40만 명을 넘어선 것은 관련 통계가 조사되기 시작한 2003년 이래 처음이라고 한다. 지난달 청년실업률은 12.3%로, 역대 최고 수준에서 불과 0.2%포인트 모자란 수치였다.


최근 유행하는 신조어에는 이러한 세태가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이를 분석 보도한 한 언론사의 기사 내용이 유독 씁쓸하게 다가오는 건 이를 남의 얘기로 치부하기엔 요즘 젊은이들이 겪고 있을 고통의 크기가 너무도 클 것이라 예측되기 때문이다. 엇그제까지만 해도 '헬조선'이니 '흙수저'와 같은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담아내던 형태가 신조어의 주류를 이뤘으나, 근래에는 조금 더 구체적인 상황과 개인적인 어려움의 형태로 자신들의 힘든 처지를 묘사하고 있는 추세다. 


ⓒ연합뉴스


신조어는 대개 젊은 계층에서 만들어지고 소비된다. 따라서 손바뀜도 유난히 빠른 편이다. 따라서 갈수록 극심해지는 취업난과 불안정한 고용 행태를 꼬집는 용어들이 대세를 이루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취업을 위해 스펙 쌓기에 혈안이 된 세대를 꼬집는 "오스트랄로스펙쿠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규직 채용이 되지 않아 인턴만 반복하는 세대를 일컫는 "호모인턴스" 따위의 용어들은 요즘 청년세대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가장 현실적으로 압축한다. 


ⓒ연합뉴스


실업 기간이 길어지다 보면 집에 손을 벌리는 일도 쉽지 않다. 아르바이트를 통해 근근이 유지해오던 생활비도 빠듯해지는 상황, 그러다 보니 스펙을 쌓는 등 취업 준비를 위해 최소한으로 지출해야 할 비용마저 큰 부담으로 다가오게 되고,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일들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서 켜켜이 쌓인 스트레스와 억제된 욕구를 해소시킬 방안 역시 딱히 없는데...  이럴 때 사용하게 되는 비용을 요즘 젊은이들은 흔히 '시발비용'이라 일컫는다. 즉, 스트레스 때문에 이의 해소를 위해 본의 아니게 지출하는 비용을 의미한다.



취업준비생의 숫자가 해마다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데 반해 취업을 위해 학원이나 기관 등에서 수강을 하는 인구는 감소세로 돌아섰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지난해 학원이나 기관 수강 취업준비생은 22만7000명으로 1년 전보다 9000명 감소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처럼 학원에서 취업준비를 하는 사람은 줄고 ‘나홀로 취업준비생’이 늘어난 것은 장기 실업자가 증가한 것과 연관이 깊은 것으로 분석된다. 6개월 이상의 장기 실업자 수는 지난해 13만3000명에 달했다. 이러한 상황들이 자연스레 '시발비용' 등 사회적 비용을 늘리고 있는 셈이다. 


ⓒ연합뉴스


하지만 취업이 되었다고 하여 앞서의 모든 문제들이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건 결코 아니다. 이후의 난관 역시 만만찮다. 근래 유행하는 신조어엔 박근혜 정부가 줄기차게 주장하며 정책화를 시도했던 '노동의 유연화'라는 그럴듯한 문구에 내재된 이중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정규직 전환으로 알고 인턴을 시작했으나 마치 티슈처럼 쓰고 버려지는 '티슈인턴', 인턴 생활만 반복하다 보니 어느덧 기업 내 부장 직급만큼 풍부한 경험을 쌓게 된다는 '부장인턴', 일은 잘 배우지도 못하고 허드렛일이나 단순 노동만 하는 '흙인턴' 등 비정규직으로 입사하여 차별 당하면서 제대로 대우 받지도 못하고, 아울러 열심히 일해도 정규직이 될 수 없는 비참한 노동 현실을 비튼다.


사회 구성원의 다수는 무한경쟁 속에서 세계 최장의 학습시간을 견디며 힘겹게 상급학교에 진학한다. 또한 그들 중 다수는 스펙을 쌓는 등 열정을 쏟아부어 바늘구멍 같기만 한 취업의 관문을 기어이 뚫는다. 하지만 이의 기쁨도 잠시, 정규직을 약속 받고 취업하였으나 이는 지켜지지 않은 채 시간만 훌쩍 지나가고, 그들 중 일부는 운좋게 정규직으로 취업하여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상황이나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 앞에서 허덕이다가 문득 지친 거울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과연 저녁이 있는 삶은 언제쯤 올 것인지 기약 없는 헛된 꿈을 욕망하게 된다. 


우리의 고단한 삶은 과연 언제쯤 나아질까?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촉발된 작금의 정치 상황이 19대 대선 국면을 거치면서 당면한 현실을 조금은 나아지게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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