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경험의 즐거움

상처를 치유하는 또 다른 방식 '23 아이덴티티'

새 날 2017. 2. 25.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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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학교 동급생인 세 명의 소녀는 생일 파티를 마치고 일행인 케이시(안야 테일러 조이)를 집으로 데려다 주기 위해 그들 중 한 아이의 아버지 소유의 승용차에 탑승한다. 그때다. 승용차에 앉아 대기한 채 출발을 기다리던 순간, 어디선가 괴한이 등장하더니 그들의 호흡기에 정체 모를 스프레이를 마구 뿌려댄다. 소녀들은 일제히 정신을 잃고 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소녀들은 하나 둘 눈을 뜨기 시작하고, 생전 처음 접하는 공간에 자신들이 갇혀있게 된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무언가 음습한 분위기로 가득 들어찬 이곳은 사방팔방을 살펴 보아도 탈출 가능성이 거의 희박해 보인다. 소녀들은 다시 한 번 엄습해오는 공포에 몸서리치게 되는데..



한편 바깥 세상에서는 세 소녀의 실종 사실이 긴급 뉴스로 타전되며, 긴박하게 해당 소식을 알리고 있었다. 이들을 납치하여 모처에 가둔 범인은 케빈(제임스 맥어보이)이라 불리는 청년이었다. 그는 해리성 인격장애를 앓고 있으며, 그로 인해 서로 독립 개체인 다중 성향의 인격이 그의 신체를 빌려 번갈아가며 출몰하곤 한다. 


그는 이 방면에 있어 최고 전문가 가운데 한 사람인 플레처 박사(베티 버클리)의 도움에 의지한 채 살아가고 있는 입장이다. 소녀들의 실종 사건이 빚어지던 날 전후로 케빈은 플레처 박사에게 수차례 긴급 진료를 요청하는 등 무언가 이상 증세를 드러내게 된다. 모종의 변화가 있음을 직감한 플레처는 그를 추궁해 보는데... 



케빈은 데니스, 패트리샤, 헤드윅, 배리, 제이드 등 모두 23개의 서로 다른 인격체를 한몸에 지닌 독특한 인물이다. 각각의 인격체는 독립적으로 작용하지만, 케빈의 몸뚱아리 안에서 서로 주도권 쟁탈을 위한 치열한 수싸움이 벌어지곤 하며, 서로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납치된 소녀들은 외양은 같으면서도 각기 다른 인격체를 지닌 인물의 수시 등장으로 인해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상황이 더욱 어지럽기 만하다. 



세 명의 소녀 가운데 케이시는 보통 사람들과는 조금은 다른 인물이다. 학교에서는 툭하면 말썽을 부려 이른바 왕따로 취급 당하고 있었으며, 또래들과 어울리는 일을 몹시도 싫어하는 묘한 습성을 지닌 아이로 낙인이 찍혀있다. 물론 그녀의 이러한 행동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케이시가 또래 아이들과는 조금은 다르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따로 있다. 그녀가 성장하면서 경험했던 모종의 사건들 때문이다. 극이 한창 진행되고, 분위기가 점차 고조되면서 그녀를 둘러싼 과거의 실체들이 수면 위로 그 전모가 차츰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래서일까? 종잡을 수 없는 범인의 다중인격을 접하게 된 다른 아이들은 더욱 혼란스러워지고, 자신들을 가둔 범인과 맞서 싸워야 한다거나 그로부터 탈출해야 한다며 대립각을 세우려 하지만, 케이시는 마치 그의 속마음과 정체를 꿰뚫고 있기라도 한 양 시종일관 침착한 태도로 범인의 실체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공감하며, 소통을 시도하려 한다. 이렇듯 범인과 케이시 사이에는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는 도저히 형성될 수 없을 법한, 알 듯 모를 듯한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모종의 정서적 공감대 같은 게 읽힌다. 



때로는 냉혹하고, 때로는 지극히 여성스럽거나, 때로는 아주 천진난만한 9살 소년 등 23개의 서로 상이한 인격체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제임스 맥어보이의 섬세한 연기를 보는 재미는 상당히 쏠쏠하다. 각기 다른 인격체들 사이에서 서로 힘겨루기를 통해 주도권을 빼앗으려 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점차 정신분열 증세로 치닫는 장면들도 인상적이다. 다만, 스릴러 장르 특유의 긴박감은 다소 떨어진다.  

  


세 명의 소녀가 갇혀있던 장소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케이시에게는 어릴적 상처의 근원으로 연상될 법한 공간이자 맹수를 닮은 행위가 횡행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러한 특이한 공간적 배경은 케이시의 과거 상처마저 소환, 이를 덧나게 하는 장치로 작용하곤 한다. 그녀의 어린 시절, 맹수 아닌 맹수로부터 입은 치명적인 상처가 케빈의 그것과 함께 이 공간에서 극적으로 맞닿고 있는 셈이다. 


세상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기 마련이다. 오늘날과 같은 일이 있기까지의 과정을 복기하다 보면 그의 원인은 결국 한 곳으로 수렴해간다. 케빈이 어릴적 모질게 학대 받았던 상처가 해리성 인격장애로 진화하게 됐고, 케이시에게 현재 처해진 환경은 다시는 떠올리기조차 싫은 어릴적 비스트에 의한 상처를 덧나게 할 만큼 끔찍한 배경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는 이들처럼 감내하기 어려운 상처를 간직한 채 숨죽이고 살아가는 모든 불순하지(?) 않은 영혼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네며 색다른 치유를 시도한다. 



감독  M. 나이트 샤말란


* 이미지 출처 : 네이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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